역사속 오늘

美 ‘마샬 플랜 발표

냉전의 시발점이 된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3개월도 채 안된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샬 미 국무장관이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유럽부흥계획(ERP) 이른바 ‘마샬 플랜’을 발표했다. 2차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 경제를 재건해 자본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이루자는 것이 취지였지만 바탕에는 미국의 과잉자본을 해소하고 상품시장의 배출구를 마련할 목적도 깔려있었다.

당시 유럽의 경제 사정은 한 언론사의 표현대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최대의 비극’이라 할만큼 최악의 상황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유럽 경제가 회복되어야 시장도 확보되고 전쟁 중 빌려준 돈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점차 영향력이 커져가는 공산권의 침투도 대비해야 했다. 당초 “모든 유럽 국가에 문호가 열려있다”는 연설을 믿고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도 동참할 뜻을 비쳤으나 미국의 정책이 반소·반공을 전제로 추진되자 이들 국가들은 불참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 16개 국만이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구성해 공개적으로 미국에 224억 달러 지원을 요청했다.

미 의회는 1948년 대외원조법을 제정하고 미 정부는 정부 내 특별기구로 ‘결제협력국(ECA)’을 신설해 1951년 말까지 약 125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유럽에 제공했다. 30만 명 이상의 유럽인들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으로 소련과 서방세계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하자 소련을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공산권 국가와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방국가 공산당 대표들은 1947년 9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코민포름’을 출범시켜 서방의 결속에 맞섰다. 소련은 또한 “마샬 플랜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자 유럽의 경제 주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동유럽 국가들이 이 계획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이른바 ‘몰로토프 플랜’을 발표, 미국 주도의 유럽 재편성 안에 맞섰다.

마샬 플랜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때부터 북미와 유럽의 생활수준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갭이 생겼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통합을 촉진시켜 오늘의 유럽을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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