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명동성당 준공

1898년 5월 29일, 성신강림대축일인 이날 한국 천주교의 상징인 명동성당이 착공 6년 만에 준공됐다. 축성식은 신도, 성직자, 총리대신 박정양 등 3000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교구장 위텔 주교의 집전으로 열렸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드문 붉은 벽돌을 사용한 고딕 양식의 건물에다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어 사람들은 ‘언덕위의 뾰족집’으로 불렀다.

건축을 처음 입안한 사람은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였다. 블랑은 이승훈, 정약전 등이 종교 집회를 가졌던 조선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생가터를 매입, 1882년 조정에 공사 허가를 신청했으나 근처에 역대 조선 왕조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이 있어 풍수를 침해할 수 있고 또 대궐이 보인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이 공사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공사가 재개된 것은 10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이번에는 기술자가 말썽이었다. 양옥 건축가가 전무한 탓에 벽돌공, 미장공,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시작했으나 뒤이어 일어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으로 기술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때 설계와 감독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을 막 완성시킨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한국 이름 고의선) 신부가 맡았다. 그는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온 성금 5만 프랑으로 그의 고향 몽펠리에 대성당을 200분의 1로 축소해 성당공사를 진두지휘했으나 공사 중 장티푸스에 걸려 완공을 보지 못하고 1896년에 숨졌다. 건축을 마무리한 사람은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였다. 준공 당시 성당은 이곳의 지명인 종현(鐘峴)을 따 ‘종현본당’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부터 명동성당으로 불리고 있다. 성당 지하엔 19세기 천주교 박해로 희생당한 앵베르 주교, 샤스당, 모방, 최경환 신부 등 성인 5위와 일반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봉안하고 있어 언제나 순교자들의 성스러운 피가 성당을 떠받들고 있는 셈이다. 1977년 사적 258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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