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제주도 이재수의 난(신축교난) 발화

격동의 개항기, 천주교는 정부의 묵인 하에 ‘박해 시대’를 마감하고 신앙의 꽃을 피운다. 1886년에 체결된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묵인’을 ‘공인’으로 발전시키고 덕분에 천주교가 양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대신 토착민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1895년부터 10여 년간 전국에서 300여 건의 교안(敎案·종교적 충돌)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중 가장 큰 교안이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세칭 ‘이재수의 난’이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토착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공격적인 선교방식, 천주교인을 이용한 세금징수관의 과중한 세금부과, 제주도민의 반감을 천주교 측으로 돌리려 한 일본인 수산업자의 농간 등 경제·문화적 요인들이 중층으로 작용했다. 천주교가 특권 세력으로 비치다보니 그에 편승해 이권을 챙기려는 일부 신도들의 과도한 행동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도민들은 천주교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재수를 앞세운 도민들이 제주성을 공격해 들어가자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을 폐쇄하며 맞섰지만, 결국 5월 28일 제주성은 함락됐고 300명(혹은 700명)의 교인들은 잔인한 죽음을 맞았다.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됐으나 이미 봉기가 진압된 뒤였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천주교 측은 이 사건을 ‘신축교난(辛丑敎難)’, 혹은 ‘신축교안’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언제부턴가 ‘이재수의 난’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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