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선거… 95.5%의 투표율 기록

광복 후 우리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하루빨리 힘을 모아 신생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 좌우합작세력, 좌익 등 제 정파가 얽히고 설켜 분열과 혼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와 한민당의 돈·조직이 힘을 합쳐 세를 불려나가는 동안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이 결의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차 평양까지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와 점차 현실정치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때 좌우통합을 꾀했던 미국도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자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은 지지부진한 남북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유엔은 ‘접촉이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가결시켰다. 미군정은 이를 근거로 남북 총선거 실시를 공고했다. 그러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의 책동이 선거 성사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통신망 파괴와 경찰서 습격, 선거공무원 살해 등 선거를 방해하는 폭동과 폭행사건이 잇따랐다. 신고된 사고 건수 만 1047건이었고, 희생자 만도 100여 명에 달했다.

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으나 선거는 강행됐다. 1948년 5월 10일, 948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198명이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4·3사태로 연기된 제주도 몫 2명과 북한 몫 100명은 남겨두었다. 한민당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으나 한민당은 29명만 당선됐을 뿐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의가 55석, 무소속에서 85명이 당선됐다. 예상을 뒤엎은 한국선거사의 첫 이변이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95.5%의 투표율에 가장 공정한 선거로 기록됐다. 첫 건국 대사를 거뜬히 치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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