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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교토 헤이안신궁에서 되돌아본 1200년 전 간무천황 이야기

↑  헤이안신궁 입구의 응천문(應天門)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새벽 5시 33분. 여명의 시각이다. 갑자기 침대가 좌우로 요동을 쳤다. 오사카 출장 중에 일어난 일이다. 효고(兵庫)현 ‘아와지시마(淡路島)’에서 발생한 규모 6.3의 지진이 인접 오사카까지 뒤흔들며 사람들의 새벽잠을 깨운 것이다. 10여 초의 짧은 흔들림이 10분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지진에 대한 공포심이 커진 탓도 있었을 듯 싶다. 필자가 과거 일본 출장 중에 몇 차례 미진(微震)을 겪은 적이 있었으나, 이처럼 크게 흔들린 경험은 처음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진이 발생하자 오사카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신칸센이 잠시 멈췄고, ‘지하철이 스톱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내가 겪은 직접적 피해는 호텔 엘리베이터가 서는 바람에 8층 객실에서 1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커다란 가방을 들고서. 호텔 종업원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지진이 어디 종업원들의 잘못인가. 일본의 기상청은 1995년 한신 대지진 이후 이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고 발표했다. 일부 언론들은 “이번 지진이 한신대지진의 여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오사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짐을 챙겨 1000년의 고도(古都) 교토(京都)로 달렸다.

 

간무천황, 서기 794년 교토(京都)로 천도… 헤이안(平安) 시대 개막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다.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일본 사람은 물론 한국인들도 교토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토(京都)라는 도시의 이름도 수도-서울(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명사인 ‘서울(京)의 도시(都)’가 고유명사 ‘교토(京都)’로 정착된 것이다.

서기 794년에 교토(京都)로 천도해 수도로 정한 사람은 간무천황(桓武天皇, 737~806)이다. 간무천황은 어떤 사람일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1200여 년 전으로 되돌려 본다.

간무천황

 

간무천황은 781년 제50대 천왕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때다. 그리고 32세의 친동생 사와라(早良)가 황태자로 임명됐다. 간무천황의 어머니는 아버지 고닌천황(光仁天皇, 709~782)의 측실인 백제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720~790)다.

간무천황은 측실 태생이었으므로 천황에 오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간무천황은 배후 세력들의 계산된 행동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작가 모로미야(茂呂美耶)는 저서 <헤이안 일본>에서 간무천황은 조정의 실력자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 732~779)가 만든 ‘거대한 작품임’을 시사했다.

“간무천황과 사와라 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는 한반도의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으로 고닌천황의 비빈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당시의 조정 실력자인 후지와라노 모모카와는 고닌(光仁) 천황을 달래고, 기만·설복해 백제와 혈연관계가 있는 야마베노(후일 간무천황) 친왕을 황태자로 등극시킨다.”

간무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의 릉

 

간무천황의 어머니는 한반도의 백제계 도래인(渡來人)

고닌(光仁) 천황은 심복이자 실력자인 후지와라노(藤原)가 시키는 대로 측실 소생을 황태자의 자리에 앉혀 후일 간무천황의 자리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비극의 씨앗과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요즈음도 권력자의 주변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다시금 모로미야의 책 <헤이안 일본>을 들여다본다.

“고닌 천황 11년, 왕위를 간무천황에게 물려주는데 이때 간무천황에게는 8살의 아들 아테노(安殿) 친왕이 있었다. 순리대로라면 황태자는 당연히 아테노 친왕의 차지였다. 그런데 고닌 천왕은 오히려 다른 아들 즉, 간무천황의 동생인 사와라 친왕을 황태자로 임명한다. 이것이 바로 훗날 집안싸움의 씨앗이 잉태되는 사건이다.”

간무천황 즉위 후 일본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繼)라는 인물이다. 실력자 후지와라노의 조카이기도 했지만, 그의 어머니 역시 한반도의 도래인으로 간무천황과 특별히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암살당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배후가 황태자인 사와라 친왕으로 지목됐다. 사와라 친왕이 아무리 무고를 주장해도 죄는 그대로였다. 간무천황은 친동생을 효고(兵庫)현의 아와지시마(淡路島)로 유배시켰다.

 

천도(遷都) 이유는 ‘왕자의 난’ 이후 자신을 괴롭히는 원령(怨靈)들을 떨쳐내기 위해

간무천황은 동생 사와라 황태자가 죽은 후 유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연이은 주변 인물들의 사망과 역병, 홍수 등은 역귀(疫鬼)가 광기를 부린 것으로 판단하고 아와지시마(淡路島)에 있는 동생의 묘지를 극진히 관리했다. 그래서 교토로의 천도는 당시의 주술가·종교가·음양사들의 중지를 모아 헤이안쿄(平安京, 오늘의 京都)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던 것이다. 간무천황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모든 원령(怨靈)들을 떨쳐내기 위해서다.

북쪽에는 현무의 후나오카산(船岡山), 동쪽에는 청룡의 가모가와(賀茂川), 남쪽에는 주작의 교케지(巨瓊池), 서쪽에는 백호의 산요도(山陽道)와 산인도(山陰道) 두 개의 도로를 만들어 현무·청룡·주작·백호의 사신(四神)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래서일까? 교토는 1천년 이상 지속되면서 흥성했다(헤이안 일본).

헤이안신궁 경내도

 

헤이안 시대는 이때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한 1185년까지의 일본 정권을 말한다. 지금의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은 천도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지어졌다. 1976년 화재로 소실돼 재건됐고, 2010년 12월 주요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래서 인지 모든 건물들이 역사의 때가 묻지 않고 새로워 보였다.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목조 건물에 대한 소방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수 천 년의 역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헤이안 신궁을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특이한 제복 차림의 긴 행렬이 나타났다. 헤이안 신궁 관계자들과 발전위원회 위원들이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외부로 나온 것이다. 간무천황을 주신으로 받들고 있는 신궁이어서 인지 행렬자체가 근엄해 보였다. 이 또한 보기 드문 볼거리였다. 관광객들은 이들의 엄숙한 모습에 숨을 죽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헤이안신궁의 신원(神苑) 중 한 곳인 동신원(東神苑)

 

신궁 밖에서는 매월 한 차례 프리마켓 시장 열려

신궁 밖으로 나가자, 우리의 재래시장 같은 장터가 있었다. 200여 개의 가게들이 참가하는 이벤트였다. 매주 두 번째 토요일에만 열리는 특산품을 파는 재래식 시장이 선 것이다. 이를테면 헤이안신궁 밖 프리마켓인데 명칭은 헤이안라쿠이치(平安樂市)다. 가게에 나온 물건들은 모두가 손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작은 분재에서부터 액세서리, 도자기 등 수제품들이 다양하게 늘어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좋은 고도(古都), 손으로 만든 도시”라는 슬로건이 어울렸다. 재단법인 교토헤이안재단의 사무국장은 나에게 “2012년 9월부터 이 행사가 시작됐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이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에 종료됩니다만, 당일 약 4000-5000여명의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일단,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흑백 사진을 팔고 있는 한 젊은이 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칼라 시대에 흑백 사진을 파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면서 “제법 많이 팔리고 있다”고 만족해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현대화의 물결이 거세더라도 1000년의 옛 도시 교토(京都)에 어울리는 것은 역시 복고풍의 물건들이었다.

헤이안신궁 밖 프리마켓. 명칭은 헤이안라쿠이치(平安樂市)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헤이안(平安)으로의 여행은 나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제공했다. 작별을 고(告)하는 벚꽃들이 나비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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