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7년(세종29년) 4월 20일,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도원(桃源)을 거닐었다는 간밤의 꿈을 자신이 후원하는 당대 최고 화가 안견에게 전해주었다. 사흘 뒤인 4월 23일 안견은 가로 106.6㎝, 세로 38.7㎝ 크기의 비단 위에 먹과 채색으로 꿈을 담아 안평대군에게 바쳤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였다. 조용하고 온화한 평지와 구름허리를 뚫고 솟은 웅장한 기암절벽이 꼼꼼한 필치로 묻어나왔다.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이 제서(題書)·발문(跋文)·시 1편을 그림에 싣자 성삼문·정인지 등 21명의 대학자들도 앞다퉈 친필로 23편의 찬양시를 그림에 올렸다. 하지만 안평대군을 포함해 이들 중 상당수가 수양대군(세조)이 권력을 잡고나서 줄줄이 처단되는 바람에 그림에 오른 이름들은 결과적으로 ‘살생부’가 되고 말았다. 정작 안견은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가 언제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나 또 언제 세상을 떠 어디에 묻혔는지는 일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에 없다.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 텐리대(天理大)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는 딱 한 번 있었다. 전 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기록에 의하면 1952년 80만 엔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정부의 예산부족으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