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김구·김규식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방북

“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하는 것이다. …성취되지 않으면 나는 38선을 베개 삼고 자결할 것이다.”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 선생이 경교장 앞마당을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 자신의 평양 방북을 만류하지 말아달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그리고 백범은 오후 늦게 38선을 넘어 이튿날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이 방북의 목적이었다. 연석회의는 그동안 김일성이 기회있을 때마다 언급한 것이지만 백범이 남북한 통일의 물꼬를 터보려는 충정에서 공식 제안함으로써 비로소 성사되었다. 백범의 제안에 김규식과 안재홍이 동조하고 나섰으나 미군정과 이승만은 냉담하게 반응했다.

3월 25일 북한의 9개 정당과 단체이름으로 된 성명문이 평양방송의 전파를 탔다.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을 4월 19일 평양에서 여는 연석회의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좌익·우익·중도파를 망라했다지만 면면이 좌익이거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 일색이었다. 김일성에게 남북연석회의는 인민정권을 선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김일성을 비롯 1500여 명이 참석해 26일까지 열린 이 연석회의에 남한에서는 김구·조소앙·조완구 등이 참석했다. 백범은 회의에서 인사말을 했지만 공허함을 느꼈다. 회의 일정이 자신과 사전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모든 결의문이 박수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이 참석한 ‘4김 회담’에서도 4개항이 결의됐지만 평소 김일성이 주장해오던 판에 박은 내용들 뿐이었다.

백범으로서야 남북분단을 막아보자는 간절한 소망에서 감행한 북행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백범과 김규식은 결국 지친 몸을 끌고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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