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김병익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가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라는 글에서 예로 든 이완용에 대하여

↑ 주미공사 관리들.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이고 뒷줄은 수행원들이다.(1887년)

 

by 김지지

 

김병익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가 계간지 ‘본질과 현상’ 2019년 봄호에 실린 10쪽 분량의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라는 글에서 이완용에 대해 “나는 ‘친일파’라는 한마디 낙인으로 한 시대의 거물을 단색적으로 색칠하며 그의 전면을 단정 짓는 것에 대해 동요를 느꼈다.”라고 했다. 짧게나마 이완용의 삶을 추적해본다.

 

주미 대리공사로 활동하면서 친미 개화파로 변모하고 친일 개화파들과는 각 세워

이완용(1858~1926)은 을사조약(1905년) 때는 ‘을사5적’, 정미7조약(1907년) 때는 ‘정미7적’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며느리와 사통한 패륜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고종에게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른 불충한 신하(황현의 ‘매천야록’) 등 인간 말종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 부분만은 사실이 아니다.

이완용

 

이완용은 친부·양부 모두에게 더없는 효자였고 학식이 깊은 선비형 엘리트였으며 가슴 뜨거운 개화파 선구자였다. 말이 많지 않았고 술을 즐기지 않았으며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만 돈과 관련된 구설수에 수차례 오르내린 것으로 미루어 재물에 대한 집착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완용은 당대의 명필이었다. 덕수궁의 경소전·숙목문·살량문, 창덕궁의 함원전 등 궁궐의 전각들은 물론 독립문 편액에 글씨를 남길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다.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현판도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다이쇼 일본 천황의 요청에 응해 비단 위에 휘호를 써 보낸 적도 있었다. 전국의 명승 고적지를 유람하며 글씨를 남겼고 국보급에 속하는 유명 사찰의 대웅전과 천왕문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이처럼 재주가 많고 얼핏 심성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어쩌다가 만고의 역적이 된 것일까.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떼고 7살 때 효경, 8살 때 소학을 마쳤다. 9살 때인 1867년 4월 먼 친척이자 대원군의 사돈인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무렵 이호준은 고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완용은 24살이던 1882년 특별과거인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나 4년 만인 1886년에야 관직의 길에 들어섰다. 그해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관립학교로 설립된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다. 덕분에 1888년 1월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가는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를 수행했다.

육영공원 수업 장면

 

몸이 아파 5개월 만에 귀국했는데도 고종은 이완용을 다시 중용해 주미 대리공사로 발령했다. 이완용은 1888년 12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889년 6월부터 1890년 9월까지 1년 3개월간 근무하면서 친미 개화파로 변모했다.

 

독립협회 회장 역임하고 만민공동회 주도적으로 이끌어

이완용은 조선 정부의 고위 관료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장기 체류하면서 서구 문명사회를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나름대로 정밀하게 관찰했다. 다만 미국에 오랫동안 체류한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등과는 달리 기독교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는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서양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되 동양 전래의 도에 기초해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왕실과 민씨 일족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연유를 여기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이완용은 1890년 10월 귀국 후 고종의 각별한 신임 속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공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후 1894년 12월 외부협판(차관급)에 임명되었다. 그의 입각은 당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정동파의 결집과 관련이 있었다. 정동파는 각국 외교관들이 정동의 손탁호텔을 중심으로 활동할 때 이곳을 왕래하며 그들과 빈번하게 접촉한 친미·친러파를 일컬었다. 이범진·이완용·민영환·윤치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동파는 고종과 민비의 의중에 따라, 반일적 색채를 띠고 왕권을 제약하려는 친일 개화파들과 각을 세웠다.

1895년 5월 성립한 박정양·박영효 내각(제3차 갑오내각) 때는 학부대신(장관급)으로 승진했다. 재임 기간은 4개월에 불과했지만 서구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 성균관에서 역사·지리·산수 등을 가르치게 해 성균관을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탈바꿈시키고 서울에 관립 소학교 4개교를 신설해 최초의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던 중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친일 내각이 수립되자 정동파는 실각하고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1896년 2월 11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내오는 아관파천을 이범진과 함께 결행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단행된 개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이범진은 법부대신 겸 경무사(현재의 경찰청장)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친러파인 이범진이 독주하자 이완용은 전 주미공사 서기관이자 친미파인 이하영을 주일공사로 부임토록 손을 써 친일 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그것은 자파 세력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활용 가능한 세력과 연대를 모색할 줄 아는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이완용이 쓴 ‘무후초려시'(武侯草廬詩,왼쪽)와 ‘괴수득신뢰사오년(愧收得身來巳午年)’. 무후초려시는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할 때 제갈량이 읊은 시이고 괴수득신래사오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썼다.

 

점차 일본과 타협해 유리한 조건 받아내자는 현실론적 입장으로 바뀌어

이완용은 유생 등 보수 세력의 발호에 대응하면서 개혁을 표방하는 세력의 결집에도 동참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 발족 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발기 모임은 자신이 외부대신으로 있는 외부 건물에서 열도록 했다. 기금도 가장 많이 냈다. 이후 독립협회 위원장과 부회장·회장을 지내며 독립협회를 음양으로 후원하고 만민공동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 때문인지 1898년 3월 10일 종로의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 강요의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 직후 갑자기 해임되고 전북관찰사로 임명되면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났다. 1900년 7월에는 공금을 유용했다는 탐학 조사를 받아 관직 생활을 접었고 1901년부터는 양부의 3년상을 치르느라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은거 생활을 했다.

이런 이완용에게 또다시 변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러일전쟁 후였다. 1905년 9월 하야시 곤노스케 주한 일본공사의 추천을 받아 학부대신으로 복귀해 본격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때는 박제순(외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등과 함께 조약 체결에 찬성, 이른바 ‘을사 5적’으로 불렸다. 당시 이완용은 조선의 실력으로는 일본에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일본과 타협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자는 현실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박제순을 참정대신(총리)으로 하는 친일 내각이 구성되었으나 박제순은 보호조약 체결 당시 책임이 큰 외부대신이었다는 점에서 각계의 공격을 받았다. 대한자강회, 서북학회 등 계몽운동 단체들과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도 친일 내각 타도를 목표로 맹렬히 정부를 공격했다. 고종도 친일 내각을 불신임하는 방법으로 끊임없이 주권 회복을 시도했다.

 

일제 통감부, 이완용 내각의 위상을 강화해 황제권 위상 축소시켜

1906년 3월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1907년 5월 22일 유약한 박제순 내각을 경질하고 일찍부터 고종 폐위를 주장해온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발탁했다. 이완용이 보호조약 체결 당시 단호한 찬성 태도를 보인 것과 황제 폐위 방안을 제시한 것 등이 발탁의 이유였다.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내각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 나이와 경력이 어리거나 짧았다. 이례적으로 지위가 낮은 3품관들이 일약 대신의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관료 사회에서는 ‘3품 내각’으로 불렸다. 고종과 재야 정치단체가 강력히 반발했는데도 일진회장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하고 오랜 일본 망명 생활에서 귀국한 조중응을 파격적으로 법부대신에 임명해 여론이 좋지 않았다.

대한자강회, 서북학회 등 재야 단체들과 천도교 세력들은 송병준이 입각한 신내각에 더욱 반대했다. 일반의 여론도 냉담했으나 통감부와 이완용 내각은 6월 14일 그동안 황제권의 반발로 실시하지 못했던 ‘내각 관제’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일본의 내각 관제를 모델로 한 신관제에서 내각 총리대신은 정부 수반으로 내부, 탁지부, 군부, 법부, 학부, 농상공부 등 각부를 통할하게 되었다. 내각의 위상을 강화함으로써 황제권의 위상을 축소하고자 한 것이다.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과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중앙)의 사진. 뒤 건물은 중명전이다.

 

이완용은 이토 통감과 호흡을 맞춰 고종을 퇴위(1907.7.20)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이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을사조약 때까지만 해도 백성들로부터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사람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박제순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양위를 계기로 매국노의 상징은 이완용으로 바뀌었다.

이토는 군중의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정미7조약을 이완용과 체결(1907.7.24)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8.1)시켰다. 이완용은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 훈장을 받았다. 순종도 이완용에게 공을 세웠다며 ‘이화’ 훈장을 수여했다. 고종을 양위시키고 내정의 권한을 일본에 넘겨준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와 조선 황실로부터 동시에 훈장을 받는 희귀한 일이 빚어진 것이다.

고종

 

이완용의 합병 의사에 통감부 국장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고 환영

1909년 6월 이토가 통감에서 사임하고 7월 6일 일본 정부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병합한다는 내용의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의결했다. 후임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으로부터 사법권을 위탁받아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면서 이완용에게 이른바 ‘기유각서’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이 이 문제를 내각회의에 부쳤을 때 이완용을 제외한 내각 대신 6명 중 4명이 찬성함으로써 통치권의 상징인 사법권도 일본에 넘어갔다.

이완용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고 쓰러지자 조문을 위해 중국의 대련만까지 갔다가 현지 일본 거류민들의 분노에 막혀 상륙하지는 못하고 선상에서만 조문하고 돌아왔다. 그 후 3일간 조선 전국에 음악 연주를 금지하고 장충단에 설치한 이토 영정에 조의를 표하도록 했다.

이토가 죽자 대한제국을 합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은 물론 국내 일부에서도 높아졌다. 송병준은 일본의 낭인과 군부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방안을 제시했고 일진회장 이용구는 12월 5일 ‘정합방(政合邦) 청원서’를 통감, 이완용, 순종에게 제출했다. 이완용 역시 탁지부대신 고영희를 일본에 보내 합방 조건을 제출케 했다.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성당(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던 중 이재명 의사의 비수를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신임 통감으로 부임하자 8월 4일 측근인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에게 보내 합병 의사를 전달했다. 훗날 고마쓰는 당시의 상황을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고 환영했다.

이재명 의사

 

8월 22일 순종에게서 전권 위임장을 받아 데라우치 통감과 함께 한일합방 조약 즉 ‘병합을 알리는 조칙’에 조인함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매국노의 원흉이 되었다. 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공로로 받은 대가는 거액의 특별 은사금과 백작 작위였다.

 

이완용의 대세 순응론…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합방 후에는 1911년 3월 국내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를 사실상 창립하고 주도했으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912년 7월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고 1920년 12월 조선 귀족 최초이자 유일한 후작으로 승작되었다. 1924년 아들 항구가 남작 작위를 습작해 조선에서 유일한 부자 귀족이 되었다. 1926년 이완용이 죽은 후에는 후작 작위가 장손 이병길에게 세습되었다.

이완용(가운데)이 아들 이항구(뒷줄 가운데), 손자들과 찍은 사진. 이완용 품에 있는 아이는 4손 이병철, 뒷줄 왼쪽은 장손 이병길, 오른쪽은 차손 이병희, 앞줄 왼쪽은 3손 이병주다.

 

이완용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손병희가 민족 대표자 속에 이완용을 넣기 위해 그와 접촉할 정도로 처세에도 능했고 신망도 두터웠다. 당시 이완용은 “세상이 나를 친일 매국노라고 하는 데 이제 와서 민족 대표자가 되면 뭐라 하겠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완용은 3·1운동 사실을 밀고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밀고하지 않았다. 대신 3·1운동 후 3번에 걸쳐 담화 형식의 글로 3·1운동을 비난했다. “아이들의 헛소리를 믿고 지방의 인민들이 부화뇌동”, “조선 독립 선동은 허설이요 망동”,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 동종동근(同種同根)이므로 독립할 이유가 없다”는 망발을 일삼았다. 1926년 2월 11일 눈을 감았고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완용이 3·1운동에 대해 보낸 경고문

 

시신은 국민들의 분노에 찬 훼손이 두려워 멀리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 벽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소 훼손이 잦아 직계 손들이 1979년 파묘해 화장 처리했다. 이때 이완용의 묘에서 일제에 충성한 공로가 적힌 관 뚜껑이 나와 원광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완용의 친척 후손인 역사학자가 가져가 불태웠다고 한다.

일제에 충성한 공로가 적힌 이완용의 관 뚜껑

 

이완용의 매국매족 행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전문가들이 먼저 주목한 것은 대세 순응론이다. 이완용 평전을 쓴 김윤희는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오명을 쓴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실리를 추구했던 사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완용은 다른 양반 관료들과 달리 선진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뛰어난 머리와 처세술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중 대세가 일본으로 기운 것을 간파하자 일본과의 싸움이 힘에 부치기도 하려니와 부질없다고 생각해 저항보다는 순응 쪽으로 행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능숙한 영어 실력에 국제 정세를 읽는 안목을 갖춘 외교 엘리트라면 그 무렵 누구라도 빠지기 쉬운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훗날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고 말했던 매국의 변도 이런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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