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프랑스 앙리 4세 ‘낭트칙령’ 발표… 신교도에 광범위한 종교 자유 주어져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36년간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종교전쟁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무렵 프랑스 변방의 신교 국가 나바르에 젊은 왕이 있었다. 그는 1572년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1만 명 가량의 신교도가 죽음을 당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을 겪고 그곳에 3년 반 동안 볼모로 잡혔다. 그 또한 ‘위그노’로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가 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면서까지 왕위계승을 막았지만 결국 그는 1589년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통치자 가운데 한명인 앙리 4세였다. 그는 위고노였지만 즉위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일생동안 4번의 개종과 30여 차례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프랑스의 종교를 통일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칙령에 따라 신교도에게는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만 빼놓고는 어떤 지역에서든 공동예배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을 위해 많은 교회와 100여 개의 피난처가 마련됐다. 그러나 신교 측은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종교를 버리면서까지 종교통합에 힘을 쏟은 결과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 18일, 태양왕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가 누려온 모든 종교적·시민적 자유가 박탈돼 종교혼란에 휩싸이자 40만 명 위그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그리고 신대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은 속이 시원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상공업자와 군인이었던 위그노가 떠난 공백은 프랑스에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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