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로버트 피어리 인류최초로 북극 탐험 성공

↑ 로버트 피어리

 

1909년 4월 6일, 지구에서 제일 북쪽 끝 얼음 위에 한 사내가 서있었다. 20세기 탐험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한 용감한 사내의 이름은 로버트 피어리(1856~1920)였다. 피어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흑인대원 매슈 헨슨과 에스키모인 4명 역시 그 순간을 감격스러워했다. 피어리는 성조기를 꺼내 기념사진을 찍고 성조기의 가장자리를 찢어 ‘1909년 4월 6일 북위 90도에 닿았다. 피어리’라고 쓴 종이와 함께 얼음 속에 묻었다. 그동안 피어리는 북극점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날 때마다 성조기의 가장자리를 찢어 실패 지점에 묻어왔었다. 그런데 사내는 발가락이 두개 밖에 없었다. 7년 전인 1902년 북위 84도 17분 지점에까지 갔다가  동상으로 8개 발가락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금기 23년간을 극지탐험에 바치고 1891년부터 북극 원정을 시작한 피어리가 마지막 탐험을 위해 ‘루스벨트호’를 이끌고 뉴욕항을 떠난 것은 1908년 7월 6일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9개월 만에 피어리는 그때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북극점 위에 자신의 발자욱을 새겼다. 10월 1일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프레드릭 쿡과의 ‘북극 최초 발견자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논쟁은 9월에 피어리와 쿡이 각각 자신이 최초로 북극탐험에 성공했다고 불과 닷새 차이로 본국에 타전하면서 촉발되었다.

쿡은 피어리보다 1년 앞선 1908년 4월 21일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뉴욕헤럴드가 쿡을 지지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지와 뉴욕타임스가 피어리를 지지하는 가운데 논쟁은 미국 탐험계와 지식인 사이에 뜨겁게 불붙었다. 일반 가정에까지 번져 치열한 설전과 비난들이 오고갔다. 그러나 쿡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역사는 피어리를 최초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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