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국의 제1차 천안문 사건… 광장 곳곳에 선혈 낭자

1976년 4월 4일, 중국 베이징의 하늘은 잔뜩 흐리고 쌀쌀했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만은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20만 명 군중들이 3개월 전인 1월 8일에 죽은 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애도하고 그 정적 ‘4인방’을 규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를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로 몰아 격하하려는 극좌파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이고도 거센 반발이었다.

꽃들로 파묻힌 인민영웅기념비에는 저우언라이의 거대한 초상화가 놓여 있었고 그 밑에는 그를 추모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주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타도하라!” 4인방을 겨냥한 군중의 외침이 세차게 터져나왔다. 5일 새벽 1시, 4인방의 사주를 받은 수천 명의 민병과 경찰들은 화환과 플래카드를 실어갔고 인민영웅기념비를 봉쇄했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57명도 함께 끌려갔다. 아침에 다시 광장으로 몰려든 군중은 밤새 일어난 일에 격분했다. 수만 명의 군중이 민병과 경찰 지휘부에 쳐들어가 차량과 건물에 불을 질렀다.

밤 9시 반 광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더니 이내 다시 켜졌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라는 신호였다. 민병 1만 명과 경찰 3000여 명, 인민해방군이 곤봉과 혁대를 손에 쥐고 일제히 군중 속을 파고들었다. 포위된 군중들은 이들의 폭력에 힘없이 쓰러졌다.

상황이 종료됐을 때 광장 곳곳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이징에서만 388명, 전국 각지에서 1000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만 전해졌다. 훗날 사람들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구별하기 위해 이날의 비극을 ‘제1차 천안문 사태’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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