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미 의회, 1차대전 참전 결정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순수한 무역거래라는 명목 하에 연합국 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공급하며 실리를 챙기면서도 참전은 거부한 채 중립을 지켰다. 연합국은 좀처럼 참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윌슨을 향해 “친독파”라는 비난까지 퍼부으며 참전을 재촉했으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미국의 참전을 불가피하게 만든 결정적인 두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짐머만 전문 사건’이었다. 분노한 윌슨이 1917년 4월 2일 의회에 나가 참전 승인을 요청하고, 상원이 82대6(4월 4일), 하원이 373대50(4월 6일)의 압도적 다수로 윌슨의 대독(對獨) 참전 결의안을 승인함으로써 미국은 비로소 전쟁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러나 미 육군 병력이 19만에 불과한 데다 신병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데만 최소한 6개월이 걸려 참전은 더디게 진행됐다. 6월13일 파리에 도착한 수백 명의 선발대도 전선에 투입되기는커녕 포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훈련 만을 반복해 프랑스인들의 비난을 샀다. 연말쯤에 가서야 17만 여명이 유럽에 파견돼 비로소 미군은 제대로 된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독일에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미국이 전시체제로 전환을 완료한 1918년에 이르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해 결국 1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기간 동안 미군은 전선에 투입된 200만 여명 가운데 5만 여명이 전사하고 20만 여명이 부상했다.

그렇지만 참전은 미국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19세기 말 연평균 12억 달러였던 대외 수출은 1차대전 중에 연평균 65억 달러로 증가하고, 전후에도 47억 달러 이상의 호황을 유지했다. 1920년 말에는 116억 달러의 전쟁채권을 포함 270억 달러의 해외자본을 갖게 돼 세계최대의 채권국이 됐고, 전전(戰前)에 19억 달러에 못미쳤던 금 보유량도 전후 몇 년 사이에 46억 달러로 늘어나 전 세계 금보유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