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민족지도자 이상재 사망

월남 이상재는 일제하 민족진영 모두가 인정하는 ‘큰 어른’이었다. 젊어서 일본과 미국을 경험한 진정한 근대인이자 세계인이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혼의 소유자면서도 늘 유머와 웃음이 가득했던 그가 일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게된 것은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아들과 함께 감옥에 들어가면서였다.

우연히 감옥 벽 틈에 끼여있던 마태복음 5장과 산상수훈을 발견한 이상재는 읽고 또 읽으며 기독교를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1904년에 풀려나서는 YMCA를 통해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1905년부터 YMCA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한국인 최초의 YMCA 총무가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 밀사 사건 때도 투옥됐으나 1919년 3·1운동 때도 배후인물로 지목돼 또 옥고를 치렀다.

조선교육협회 회장과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 전신) 총재를 역임한 그가 언론인으로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은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면서였다. 그가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석간을 발행하고 신문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했으며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를 채용했다. 그 덕에 조선일보는 재정난과 일제의 거듭된 탄압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세금을 제때 못내 가산을 전부 강제 차압당한 적이 있을 만큼 그는 언제나 가난했다. 조선일보가 경영난에 시달릴 때면 월급을 자진 반납하곤 했으니 가난이 그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1927년 2월에는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나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난 1927년 3월 29일 결국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에는 무려 2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그의 죽음은 온 국민의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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