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남로당 핵심 간부 김삼룡·이주하 검거

1950년 3월 28일,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 서울 아현동에서 검거됐다. 그와 함께 남로당을 이끌어온 이주하도 하루 전 예지동에서 검거되고 남로당 조직원 142명도 일망타진됨으로써 남로당 조직은 사실상 이 땅에서 사라졌다.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후 3년 간이나 남로당을 이끌어온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이주하는 김삼룡의 고문으로 무장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특히 김삼룡은 머리가 비상하고 변장술에도 뛰어나 경찰을 골탕먹이기 일쑤였다. 체포될 때도 엿장수로 변장한 모습이었고 색안경을 7개나 소지하고 있었다. 비밀 아지트도 서울에만 8개나 돼 수시로 장소를 변경하며 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주하는 일제하 노동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이끌었던 ‘태평양노동조합’은 1930년대의 가장 중요한 현장조직이었다. 일제 하에서 5년 간 복역하기도 했던 이주하는 일제말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전향하거나 은둔하고 있을 때 끝까지 노동운동에 몸바친 ‘전위혁명가’였다.

남로당의 몰락 위기는 1949년 9월 김삼룡의 한 심복이 검거되면서 시작됐다. 심복을 통해 김삼룡의 은신처를 확인한 경찰이 비밀 아지트를 급습하자 김삼룡은 철조망을 넘어 피신하고 이주하만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때 이주하는 소지하고 있던 극약을 삼켰으나 이를 눈치챈 경찰의 응급조치로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고 20여 일간 병원 신세를 졌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그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중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의 소재로 이용됐다. 6월 10일 북한이 강제억류하고 있는 조만식을 이들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해놓고도 막상 우리 정부가 제안을 수락하자 교환일자를 연기하는 등 교묘한 지연책을 쓰다가 6·25 남침을 감행해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는 북한에 이용당한 꼴이 됐다. 두 사람은 6·25 발발 후 다음날인 6월 26일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됐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도 이름이 지워졌으니 남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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