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②] 부르주아 삶을 꿈꿨던 마르크스 부부… 그들에게 강남좌파 엥겔스는 ‘화수분’이었다

↑ 카를 마르크스(57살 때)와 그의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22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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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19세기 초, 독일 남부 라인란트 지역의 소도시 트리어에 중산 계급의 변호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가계 혈통상 유대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독일식으로 바꾸었다.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귀족 계급인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이 살았다. 두 사람은 개방적인 성향에 자유주의적 기질이 강해 잘 통했다. 변호사는 백작의 집을 방문할 때 아들을 데리고 갔다.

아들은 남작이 자신의 총명함을 좋아하는 데다 남작의 폭넓은 식견과 예술적 소양에 끌려 남작의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남작의 집에는 매력적이고 귀여운 모습의 딸까지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20세기 내내 두려움과 비난의 표적이자 선망과 찬사의 대상이 될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였고 소녀의 이름은 마르크스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예니 폰 베스트팔렌(1814~1881)이었다. 예니는 마르크스 누나와 학교 친구로 마르크스보다 4살이 많았다.

마르크스 생가

 

예니는 귀족 출신인데도 유대인에다 중산 계급인 마르크스의 지성에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평범한 귀족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자신만만해 했으나 깊이를 알 수 없는 마르크스의 검은 눈을 바라볼 때는 정신이 멍해졌다. 예니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한마디도 할 수 없어요. 혈관에서 피가 멈추고 영혼은 떨려요.” 예니가 10대 중반 무렵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자 마르크스는 질투심이 생겼으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가 17살이던 1835년 집을 떠나 본대에 입학한 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시를 쓰고 무도회에 나가고 싸움질에 끼어드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예니는 마르크스의 근황을 마르크스 누나를 통해 전해들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1836년 마르크스가 방학을 맞아 트리어로 돌아오자 부모 몰래 약혼을 했다. 예니가 이 사실을 1년 동안 비밀에 부쳐 남작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작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으나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귀족 계급이 중산 계급 유대인과 결혼한다는 것이 입방아에 오를만도 한데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남작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르크스, 평생 뜨거운 심장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마르크스는 1836년 베를린대로 학교를 옮겨 전공인 법학보다 철학에 심취하고 청년헤겔학파와 어울리며 급진적인 사상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1841년 예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로 교수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평생 뜨거운 심장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야 했다. 그것은 추방과 가난과 병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도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세상을 뿌리째 흔들어놓을 각종 논문과 명저를 집필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1842년 가을부터, 독일 쾰른에서 발간되는 반정부 기관지 ‘라인신문(라이니셰 차이퉁)’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당대의 정치·사회적 쟁점을 날카로운 필치로 분석하고 비판했다. 하지만 라인신문이 1843년 3월 강제 폐간되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약혼 후 7년만인 1843년 6월 19일 교회에서 결혼했다. 마르크스는 25살, 예니는 29살이었다. 마르크스는 결혼한 그해 10월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신혼의 달콤함을 만끽하면서도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아르놀트 루게와 공동으로 새로운 잡지를 준비했다. 그 결과 1844년 2월 파리에서 ‘독불연보(獨佛年譜)’를 창간했으나 첫 호부터 압수되는 바람에 더 이상 발행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가 2살 아래의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를 운명적으로 만나 결속을 다짐한 것은 1844년 8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였다. 두 사람은 1842년 11월 쾰른의 라인신문 편집실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만남은 일회적이었다. 두 사람은 열흘 동안 대화를 이어간 끝에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했다. 훗날 엥겔스는 그 순간을 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공동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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