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전명운·장인환 의사, 미국의 친일 인사 스티븐스 저격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20분, 한 미국인이 열차를 타려고 샌프란시스코 페리역 플랫폼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그 때, 몸을 숨기고 있던 한국인 청년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찰칵 찰칵” 빈 소리만 날 뿐 두 발 모두 불발이었다. 당황한 청년은 열차에 오르려는 미국인에게 다가가 권총으로 가격했다. 미국인이 달아나고 있을 때 갑자기 또 다른 3발의 총성이 페리역에 울려퍼졌다. 한 발은 한국인 청년의 어깨를 스쳐지나갔고 다른 두발은 미국인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 먼저 총을 쏜 청년의 이름은 전명운(1884~1947)이었고 나중에 총을 쏜 사람 역시 한국인 청년 장인환(1876~1940)이었다. 쓰러진 미국인은 스티븐스였다.

한국인 청년이 왜 머나먼 이국 땅에서 미국인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일까. 그것은 스티븐스가 1882년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면서부터 줄곧 일본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격 전에는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민은 일본의 보호정치를 환영한다”는 망언을 퍼붓고 이 내용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면서 재미 한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피격 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복부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전명운은 하와이에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그곳에서 부두와 철도공사장 노동자, 채소 행상 등 막노동을 하면서 한인단체인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장인환 역시 전명운과 비슷한 길을 걸으며 한인단체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행적은 비슷하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스티븐스를 저격할 때도 사전 모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전명운 의사는 병상에 누운 채 살인미수혐의로 기소되었다가 곧 증거부족으로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1919년 1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말년은 더욱 불행했다. 전 의사는 1947년 LA에서 타계해 현지에 묻혔고, 더 비극적인 노년을 보낸 장 의사는 실의와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1930년 5월 현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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