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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8일 자전거로 만난 홋카이도… 시간이 멈춘 듯했다

↑  게스트하우스에서 바라본 2000m급 산들

 

by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패키지여행도, 나홀로 배낭여행도 나름의 장점은 있다. 그러나 눈으로만 잠깐 보고 돌아서는 여행은 늘 아쉬웠다. 유난히 무더웠던 2018년 여름, 나는 온 몸으로 부딪히는 여행을 택했다. 오랜 친구와 함께 일본 홋카이도를 자전거로 달리기로 했다.

7박8일(7월31일~8월7일) 일정의 코스는 신치토세(新千歲)공항 ~ 삿포로(札幌, 1박) ~ 오타루(小樽, 2박) ~ 다키가와(滝川)·에베오쓰(江部乙, 3박) ~ 아사히카와(旭川, 4박) ~ 나카후라노(中富良野, 5박) ~ 후라노(富良野, 6박) ~ 삿포로(7박)로 잡았다. 총 주행거리는 약250㎞. 젊을 때 마라톤을 했던 친구는 인도 라다크 산악지대 500㎞를 산악용자전거로 달린 적이 있는 베테랑. 반면 나는 한강 주변만 몇 년째 달리고 있을 뿐 해외 라이딩 경험이 전혀 없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 속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홋카이도는 면적(8만3453㎢)이 남한(9만9720㎢)의 84%에 달하는 넓은 땅. 이번에 달린 곳은 그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신치토세 공항 밖으로 쫒겨나다

자전거를 해외로 가져가려면 앞·뒤 바퀴와 핸들을 분해해서 부피를 줄여 포장한 뒤 비행기에 실어야 한다. 폭발 방지를 위해 바퀴 바람도 미리 빼두어야 한다. 자전거 튜브조차 갈아본 적 없는 나는 출발 전날 밤 1시간 이상 끙끙대며 간신히 자전거를 분해해 전용 가방에 넣었다. 부품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도착해서 자전거를 재조립할 수 없으므로 작은 스프링까지도 조심스럽게 비닐봉지에 담았다. 다행히도 인천공항에서 추가요금 없이 ‘대형 화물’로 자전거를 부칠 수 있었다.

비행기가 동해를 건너는 동안 나는 홋카이도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할 꿈에 부풀었다. 2시간 40분의 비행 끝에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뒤 우리는 입국장 창가로 가서 자전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20분쯤 뒤 바퀴 두개를 겨우 맞추었을 즈음 공항 보안요원이 다가왔다. “안전을 위해 이곳에서 자전거를 조립할 수 없으니 건물 밖으로 들고 나가라”고 했다. 부품과 공구를 바닥에 펼쳐놓은 우리는 “자전거 조립을 끝내야 몰고 나갈 수 있지 않느냐”고 설득했지만, 안전요원은 자기의 원칙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조립하다 만 자전거를 카트에 싣고 엘리베이터를 어렵게 타서 1층으로 내려와 출국장 문을 나서자, 그제야 보안요원은 “여기서 조립해도 좋다”고 했다. 그날 홋카이도의 낮 기온은 30도를 넘었다. 허리를 구부려 자전거를 다시 조립하는데 ‘낭만’ 대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전날밤 ‘과잉 분해’로 내 자전거는 조립에 시간이 더 걸렸다. 공항 화장실에서 얼굴의 땀을 씻고 라이딩복으로 갈아입고서야 비로소 여행이 시작됐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삿포로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산치토세 공항 (출처 산치토세 공항 홈페이지)

 

첫날부터 무릎 아래가 발갛게 익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까지 지도상 거리는 30여㎞. 그러나 핸드폰 GPS(위성항법장치)의 도움 없이 지도만 보고 달린 우리는 중간에 길을 헤매는 바람에 50㎞(친구의 거리측정기 기준) 이상을 달렸다. 게다가 따가운 햇볕 아래 반바지 라이딩복을 입은 게 실수였다.

한시간쯤 달렸을 때부터 다리가 발갛게 익기 시작했다. 두시간쯤 달리자 따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덜컥 겁이나 편의점 부근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선크림을 다리와 얼굴에 발랐지만, 이미 햇빛에 노출된 쪽과 아닌쪽의 색깔은 선명히 대조를 이루었다.

한국의 국도와 달리 치토세에서 삿포로로 가는 36번 국도는 차도 옆에 자전거도로가 나있어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나 트럭, 버스 등 대형차량의 매연과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한강 라이딩보다 2배는 힘들고 속도는 절반(10㎞ 내외)으로 뚝 떨어졌다.

신치토세 공항을 출발해 삿포로로 가고 있는 필자

 

12시쯤 공항에서 출발하여 삿포로 호텔에 도착한 것이 거의 오후7시쯤이었다.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 중간 휴식시간을 빼면 약5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 때문에 첫날밤 삿포로의 오도리공원과 방송탑은 지나치며 잠깐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예약한 비즈니스 호텔은 자전거를 호텔 안에 두지 못하게 해 길가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 여행에 살짝 후회가 밀려왔지만 하나의 경험으로 삼기로 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명언 남긴 클라크 흉상 앞에서

이튿날(8월1일) 아침 홋카이도(北海道) 대학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자전거 여행의 장점이었다. 14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이 대학은 일본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설립된 9개 제국대학 중 하나이다. 9개는 일본 내의 도쿄(東京)·교토(京都)·도호쿠(東北)·규슈(九州)·홋카이도·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등 7개와, 일제 때 식민지에 세워진 경성(京城. 서울)·타이베이(臺北) 제국대학 등 2개를 말한다.

홋카이도 대학 전경 (출처 홋카이도 대학 홈페이지)

 

홋카이도 대학 내에 외국인 흉상이 있어 가보니,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장을 지낸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 1826~1886)의 흉상이었다. 그는 이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업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초빙되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홋카이도를 세계적인 농업산지로 키우기 위해 외국인재를 영입한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의지의 산물인 셈이다. 클라크는 청소년 시절이면 누구나 듣는 유명한 문장,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명언을 일본 학생들에게 남긴 교육자이다.

윌리엄 클라크 흉상 (출처 홋카이도 대학 홈페이지)

 

자전거로 둘러보니 북방생물권과학센터, 저온과학연구소, 북극지역연구센터 등이 눈에 띈다. 이 대학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특성을 살려 식물, 농작물, 수산물 등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평탄한 지형의 교내에서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을 나와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구 홋카이도 청사. 빨간 벽돌 건물이어서 아카렌가(赤れんが)로 불리는 이 건물은 미국식 네오바로크 양식의 절제된 건축미를 뽐낸다. 건물 내부에는 홋카이도의 역사자료가 전시되어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복장(라이딩복)이 불량(?)한 여행객이라 외관만 둘러보고 나왔다.

삿포로 시내에서 우연히 들fms 과자만들기 체험형 공장인 ‘하얀 연인의 공원(白い恋人公園)’은 유럽풍 건물에 미니 하우스까지 갖춘 재미있는 곳이었다. 중국 관광객들로 북새통이어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지만, 이곳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단연 최고였다.

 

다리를 건너자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 오타루였다

‘삿포로 즐기기’는 마지막날로 미루고 우리는 오타루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5번 도로를 따라가는 이날 코스는 약 40㎞. 한강변 라이딩을 생각하면 40㎞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지인들은 “홋카이도는 일본의 시베리아로서 평탄한 지형이 많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이런 기대 속에 오타루로 넘어가는 길고 긴 오르막을 만났을 때 지인들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큰 산을 넘는 긴 오르막에선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가야 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그늘 속은 시원해서 그나마 견딜만했다. 해안을 따라 산을 깎아 만든 도로와 교량 아래로 깊고 아름다운 계곡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나그네에게 인사를 건냈다. 오르막이 끝날 때쯤 오타루로 접어드는 긴 교량 위에 올라서자, 2~3도의 온도차가 느껴지는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마치 멀리서 오는 손님을 반기는 듯했다.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은 ‘중력(重力)’이다. 오르막에서 여행객의 몸을 잡아끈다. 하지만 내리막에선 중력이 가장 큰 조력자가 된다. 긴 교량을 건너 오타루 시내가 눈에 들어오는 고개부터는 페달을 밟을 필요 없는 내리막이었다. 시속 40㎞ 가량의 속도로 오타루를 향해 내달렸다.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가 된 오타루는 태엽을 감으면 돌아가며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골’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18~19세기 서양의 영향을 받은 근세 건축물들이 지금은 호텔과 상점, 공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바닷가 수산물 집하창고와 운하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운하를 오가는 유람선은 중국인 광광객들로 가득했다. 나와 친구는 근처 식당을 찾아 삿포로 맥주잔을 부딪혔다.

영화 ‘러브레터’에 나오는 오타루 운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운하와 해운창고(사진 뒤)는 이제 관광상품이 되었다.

 

급격한 공동화가 진행 중인 일본 농촌

셋째날(8월2일)은 오타루에서 다키가와까지 기차로 이동했다. 일본에선 기차든 버스든 자전거를 실을 때는 반드시 분해해서 포장해야 한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린 삿포로역에서 우리처럼 자전거여행을 하는 호주 여성 2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은 홋카이도 최북단 와카나이(稚內)로 가서 다시 리시리(利尻)섬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들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다키가와(滝川)에서 열차를 내린 뒤 다시 자전거를 조립해 약 7㎞를 달려 숙소인 에베오쓰(江部乙) 온천에 도착했다. 농촌 지역인 에베오쓰는 주택가라 해도 서너집 건너 하나꼴로 빈집이 눈에 띌 정도로 ‘공동화(空洞化)’가 진행 중이었다. 대로변 건물들도 펴쇄된 지 오래된듯 주변에 잡초만 무성했다.

일본 도시학자가 쓴 ‘오래된 집, 무너지는 거리’란 책을 보니, 일본은 이미 총세대수(5245만)보다 총주택수(6063만)가 많은 사회다. 2013년 전국의 빈집이 820만채를 넘었고, 5년 후 2023년쯤엔 1400만채로 늘어난다. 단카이세대(1947~49년생, 약800만명) 사망률이 급증할 2035년 전후에는 빈집이 2150만채로 3채 중 1채꼴이 될 걸로 예상된다고 한다(노무라종합연구소 예측).

일본은 저출산, 고령화, 인구감소, 주택노후화, 지역공동화, 지방재정고갈 등의 사회문제를 한국보다 10~20년 먼저 앓고 있다. 이런 일본의 경험과 고민에서 한국은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베오쓰의 저녁 바람은 반팔 차림이 춥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시원한 바람을 긴 파이프로 한국에 보낼수 있다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를 만나다

넷째날(8월3일), 기온은 최저 16, 최고 28도. 새벽엔 이불을 덮어야할 정도였다. 다키가와 에베오쓰에서 아사히카와의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문학관까지 약 50㎞를 달렸다. 홋카이도 중부지역은 낮은 구릉과 넓은 들판이 특징이다. 누런 밀밭과 하얀 메밀꽃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삿포로맥주와 소바의 원료가 될 것들이다.

12번 국도를 따라가는 이날 코스는 자전거 여행객에게 최고의 구간을 숨겨두고 있다. 아사히카와 도착 전 약 12㎞ 지점 교량에서 내려다보는 이시카리 강(石狩江)은 규모와 경치면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그곳부터 약 6~7㎞는 사용하지 않는 구도로여서 자동차가 전혀 없다. 강을 따라난 울창한 숲길을 천천히 달리면 아름다운 풍경과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 소리, 신선한 공기가 축복처럼 내 몸에 쏟아졌다.

아사히카와 가는 길의 열린 터널. 왼편에 강을 끼고 달리는 이 구도로의 터널은 한쪽이 열려있어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사히카와에 도착한 후 시내서 1.5㎞ 떨어진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을 찾았다. 입장료 500엔, 냉커피 300엔. 한국의 박경리 기념관이나 혼불문학관이 무료입장인 것과 달랐다. 입장료를 받고 그 돈으로 관리와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도 좋아보였다. 잡화점을 하던 평범한 주부, 미우라 아야코는 1964년 아사히(朝日)신문 1천만엔 고료(한화 1억원) 현상공모에 소설 ‘빙점(氷点)’으로 당선되어 일약 스타 문학가로 떠올랐다. 그녀는 폐결핵과 혈소판감소증 등 온갖 병마와 싸우면서도 남편의 헌신적 내조로 77세까지 소설과 수필집 등 무려 250여 편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소설을 읽는 모임이 일본에 많다고 한다.

문학관 1층에는 그녀가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원고, 옷 등 많은 유물들이 전시돼있다. 그 따뜻한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날 저녁 ‘여색(旅色)’이란 맛집에서 맛본 정통소바와 튀김도 좋았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에 걸려있는 부부의 모습

 

산책길엔 아사히카와 3번 거리와 6번 거리 주민들이 주최하는 ‘산로쿠(三六) 마츠리’를 구경하는 행운도 누렸다. 라면부터 각종 구이와 맥주 등 먹거리가 풍부했고, 동네별, 시장별로 구성된 팀들이 집단가무 경연을 펼치는 모습은 열기가 대단했다. 초등·중학생들도 가무팀에 끼어 춤을 추었다. 행정기관이 주관하는 형식적 축제가 아니라 지역 주민이 진짜 주인이 되어 마음껏 즐기는 축제였다. 이날은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만끽한 날이었다.

아사히카와에서 마주친 현지 주민들의 산로쿠 마츠리

 

옥빛 시냇물과 언덕 위 구름이 무심코 흘러가고 있었다

닷새째인 8월4일은 홋카이도에 온 이후 가장 힘들고 긴 하루였다. 지도상으론 아사히카와(旭川)에서 비에이(美英)를 거쳐 나카후라노(中富良野)의 게스트하우스까지 약 50㎞. 하지만 친구가 오는 도중에 옆길로 새면서 주행거리는 70여㎞로 늘어났다.

아침 8시 출발하여 비에이로 가는 길 우측에 제루부 언덕화원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큰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인공으로 조성된 화원은 민가의 뒤뜰에 절로핀 꽃들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오르막이 시작될 즈음 친구가 자동차의 매연이 싫었는지 갑자기 우측 오솔길로 빠졌다. 그 길은 100년 전쯤 사람들이 우마차를 끌고 다녔을 법한 자갈길이었다.

조금 달리자 자동차 여행이었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바닷물 같은 옥빛 시냇물 너머로 푸른 산등성이가 있고, 그 위로 흰구름 몇 점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곳을 지나자 계곡을 따라 끝도 없이 자갈길이 이어졌다. 출입금지 표지판도 나왔다. 홍수에 도로가 파여 끊어진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끊긴 길을 건너 다시 페달을 밟았다. 인적 없는 길을 7~8㎞ 헤매자 포장도로가 나왔다. 아스팔트길이 문명의 상징처럼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는 걸 처음 느꼈다.

비에이로 가는 길 국도를 벗어나 만난 멋진 풍경. 맑은 시냇물과 언덕위의 구름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그 길은 비에이의 구릉 위 농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유럽의 농촌 같은 들판 풍경이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 추수를 끝내고 밀짚을 둥글게 말아놓은 사료더미가 평화로웠다. 농장의 규모는 한국보다 크고 기계화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르막 다음에는 반드시 내리막이 기다린다. 비에이 언덕을 내려올 때 이번 여행 최고속도인 약 45㎞가 나왔다.

최대 난코스는 숙소인 게스트하우스 아카네 야도(Akane-yado, 夕莤舍)로 올라가는 마지막 오르막이었다. 경사는 20~30도, 길이는 5㎞쯤. 친구와는 이미 비에이에서 길이 엇갈려 혼자 숲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길을 지나쳐 민가에서 다시 확인한 뒤 급경사 오르막으로 접어들었다.

오후 6시반이 넘어 약간 어둑해진 숲속 길은 인적이 끊기고 새소리만 들려 금방 어디에서 곰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침부터 자갈길을 헤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혼자 자전거를 끌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으스스한 숲길을 한발한발 옮기는 기분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범벅되어 묘하면서도 짜릿했다. 깜깜한 밤중에 도착한 친구와 캔맥주잔을 부딪히며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평화로운 풍경을 마음에 꼭꼭 담았다

전날밤 그렇게 고생하여 올라온 게스트하우스는 5일 아침 최고의 풍경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주인 부부가 마련한 정갈한 아침식사를 남김없이 먹고 믹스 커피 한잔을 타서 건물앞 데크로 나가자, 멀리 구름 걸린 2000m급 산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왼편으로 돌리자 누런 밀밭과 유럽풍의 건물, 트랙터를 움직이는 농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온, 평화, 충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거기엔 북핵(北核)도, 김정은도, 정쟁(政爭)도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평화로운 풍경을 마음에 꼭꼭 담았다.

나와 친구는 라이딩 마지막날(8월5일)인 이날 각자의 스케줄대로 천천히 달리며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후라노로 오는 길에서 여유를 부렸다. 시골 초등학교를 구경하기도 하고, 양파농사를 짓는 노부부를 바라보기도 하고, 주택가로 들어가 실용적인 건물구조와 예쁜 정원도 구경했다. 후라노역에 도착해 관광안내소에 들어가자 한국어 안내원 시미즈 구니오(淸水邦雄)씨가 친절하게 광광후보지를 설명해주었다. 부산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그는 지도를 펼치고 주황색펜으로 볼곳과 맛집으로 가는 길을 표시해주었다.

그가 추천한 와이너리 겸 베이커리 카페인 간파나 록카테이에서 맛본 블루베리, 딸기 케익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이어 찾아간 치즈 공장은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세계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일본 농업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이날 저녁 시미즈씨가 추천한 일식집 고다마가에서 덮밥을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몸을 감싸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그날 한국은 밤 기온이 30도를 넘는 열대야였다. 나는 이날 하루의 느낌을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햇볕은 따갑고, 바람은 서늘. 먼산엔 구름, 들판엔 곡식. 사람은 친절하고 음식은 정갈. 핵도 정쟁도 없으니 평온하다.’

 

자전거 여행자를 배려하는 일본 운전자들

이튿날 우리는 후라노역 앞에서 자전거를 분해해 버스에 싣고 삿포로로 이동했다. 차비는 2260엔.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맥주 축제가 열리는 오도리 공원으로 향했다. 방송탑을 중심으로 꽃과 잔디밭이 시내를 관통하는 이 공원은 겨울엔 세계3대 눈축제인 유키마츠리가 열리는 곳이다.

젊은 남녀와 직장인들이 3000~5000cc 맥주통을 가운데 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드는 모습은 한국과 같았다. 우리도 거기에 합류했다. 오도리 공원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대량으로 조리하여 보관했던 음식은 분위기를 망쳤다. 삶은콩 안주에 맥주 한잔이면 충분한 듯했다.

마지막날(8월7일) 호텔 부근에서 자전거를 분해해 버스에 싣고 신치토세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홋카이도 여행을 돌아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본 운전자들의 배려심이었다. 7박8일 동안 자전거를 타는 우리에게 크락숀을 울리거나 위협적으로 운전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특히 대형 트럭은 우리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반대편 차선을 넘어 반원형으로 우회해 추월해갔다. 그들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이름모를 수많은 일본 운전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깨끗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시원하고 맛있는 수돗물, 비싸지 않으면서 품질이 괜찮은 일본 편의점 도시락, 축제(마츠리)의 주인으로 삶을 즐길줄 아는 보통 사람들, 원칙을 고집하는 공항 보안요원들도 잊을 수 없다. 자전거 여행이란 온 몸으로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다. 홋카이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몸이 근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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