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염상섭 사망

한국문학사에서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염상섭이 1963년 3월 14일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1920년, 당시 신문학운동의 전위적인 동인체였던 ‘폐허’지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처녀작이자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지에 발표해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고 이후 ‘삼대(三代)’ ‘만세전’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는 일제하 게이오대 재학 중 일본에서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였고, 동아일보 창간 멤버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거쳐 해방 후에는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언론인이었지만 무엇보다 한국 근대문학을 연 소설가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다. 그의 소설은 당시 서울 중류계층이 사용하는 댜양한 생활어휘들을 풍부하게 담아 ‘순수 국어의 보고’로도 불렸다. 집필량도 엄청나 중·단편 28편, 단편 150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등을 남겼다.

염상섭은 1920년대 지식인층을 파고든 사회주의 물살에도 휩쓸리지 않고, 친일의 함정에도 비껴갔던 자기 삶에 투철한 작가였다. 타협을 싫어하고 자기주장을 끝까지 펼쳤던 대단한 고집쟁이였다. 어떤 형태의 낭만주의도 거부하며 중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보니 일각에서는 그가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도외시했다며 비판하지만 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 “남북을 통튼 최대의 작가”로 평가한다.

제월이 원래 호였으나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친구들이 ‘횡보’라고 붙여주었을 정도로 그는 호주가였다. 남이 권유하면 일부러 딴짓을 해 ‘횡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술에 관한 일화는 이밖에도 많다. 친구들과 오후 3시에 남대문을 출발,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새벽 2시까지 대포집을 모조리 더듬어가며 술을 마셨는데 현진건이 60곳, 나도향이 70곳에서 골아 떨어졌을 때 횡보만은 100곳을 들른 후에야 이 엽기적인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도 부인이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안에 넣어 주어 죽는 순간까지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