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

 

1985년 3월 10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가 죽고 4시간 뒤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에 선출됐다. 최연소 정치국원에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 성장한 첫 지도자라는 점에서 세계가 그에게 건 기대가 적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그가 천지를 진동시킬 대변혁을 불러올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 무렵 소련은 지속적인 생산성 저하와 관료사회의 동맹경화현상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간파했다. 이후 격변 소용돌이 한복판에는 늘 고르바초프가 자리했다. 변화의 바람은 먼저 ‘페레스트로이카(재편)’라는 이름으로 불어왔다. 부분적이지만 비밀투표가 실시됐고 시장경제가 도입됐다. ‘신사고’ 기치 아래 탈 이데올로기, 탈 군사화가 추진됐다. 고르바초프의 또다른 날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해빙무드를 몰고왔다. 언론자유가 신장됐고 관료들의 구각이 벗겨나갔다. 과거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브레즈네프의 정체에 비난이 쏟아졌으며 정치범들이 풀려났다.

특히 외교에서의 거침없는 행보는 세계사를 다시 쓰게 했고, 세계지도를 여러차례 손질하게 했다. 레이건과는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1987년 12월)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991년 7월)에 조인했다. 유엔에서는 병력 50만 감축을 선언(1988년 12월)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유럽을 옥죄어온 소련의 사슬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의 구 정권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려도 묵묵히 받아들였다. 독일은 통일됐고 우리나라와는 85년만에 수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대안없이 도입한 자유경제는 기존의 통제경제와 마찰을 빚어 경제난을 심화시켰고,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쫒아가지 못한 보수파들은 쿠데타(1991년 8월)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강압적인 소비에트 연방을 느슨한 연방으로 바꾸려 했으나 이미 고삐가 풀린 연방 구성국가들의 독립의지는 결국 소련마저 해체시켰다. 고르바초프의 비극은 그가 개혁을 추진하면 할수록 그 개혁을 가능케 했던 자신의 절대 권력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양 날개로 화려한 비상을 꿈꿨으나 결국 자신의 이상을 시베리아 동토에 착근시키지 못한 채 날개를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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