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 전 세계에 천지개벽을 불러올 대변혁의 서곡

 

레닌 이후 처음 등장한 고등교육을 받고 세련된 젊은 지도자

50대 중반의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 )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것은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이 죽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1985년 3월 11일이었다. 소련은 이로써 레닌 이후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세련된 젊은 지도자를 맞게 되었다. 서방 세계는 고르바초프가 54세의 최연소 정치국원에다 스탈린(1879~1953, 43세 집권) 이후에 성장한 첫 지도자라는 점에서 모든 레이다망을 가동했다. 다만 그가 곧 천지개벽하는 대변혁을 불러올 인물이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남서부 스타브로폴 지방에서 태어났다. 1955년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향에서 당 관리로 23년간을 보냈다.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한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심어준 깊은 인상은 훗날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30대 시절인 1966년과 1967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각각 방문했을 때 그곳의 보통 사람들이 소련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잘먹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1978년 소련의 농업을 관장하는 당서기로 발탁되고 1980년 안드로포프의 천거를 받아 최연소로 정치국에 진입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이 죽고 안드로포프가 후임 서기장이 되었을 때는 당을 개혁하고 소련의 제도를 현대화하려는 안드로포프의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가 2년 뒤 죽고 체르넨코가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고르바초프는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다행히 체르넨코도 그 이듬해 죽어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핵무기 감축 협상 레이건과 지속적으로 벌여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선출되었을 때 소련은 지속적인 생산성 저하와 관료사회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미국과의 무리한 체제 경쟁으로 국방비도 GNP의 25%까지 잡아먹어 경제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당시는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전략방위구상(SDI)’ 실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일명 ‘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렸던 이 구상은 인공위성 같은 장비를 이용해 적국의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경제력이 미국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는데도 어떻게든 전략방위구상을 막기 위해 미국과 맞먹는 국방비를 지출함으로써 더욱 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다행히 레이건은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핵무기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핵무기 감축에 대해선 상대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었고 자신과 말이 잘 통할 만한 상대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로 그럴 때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등장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소련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국방비 부담을 줄여야 하고 서방과도 평화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1985년 11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레이건을 만났다. 사흘 동안 진행된 제네바 정상회담은 ‘평화 정착과 군축 노력’을 합의하며 종료되었지만 ‘구체적인 핵무기 감축안이 담겨 있지 않아 큰 소득이 없는 회담’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차기 회담을 제안했다. 두 번째 회담은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렸다. 이때도 전략방위구상 문제로 회담은 갈등만 남긴 채 끝났다. 하지만 이후 두 정상은 회담이 결렬된 것을 반성하고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이뤄진 세 번째 만남에서 사거리 500~5500㎞인 중단거리 탄도 및 순항미사일의 생산·실험·배치를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의 ‘중거리 핵전력(INF) 폐기조약’에 서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에 일대 변화를 불러올 신호탄

고르바초프가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와는 별개로 소련 국내에 일대 변화를 불러올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1986년 2월의 제27차 당대회에서 선언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재건)였다. 국민은 최고 권력자인 당 서기장이 공장과 거리에 나타나 자신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데 놀랐고, 그가 쏟아낸 말이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내용이라는 데 더욱 놀랐다. 고르바초프는 혼란에 빠진 경제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고르바초프는 비효율성, 후진성, 사기 저하가 소련 경제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는지 소련 사회를 완전히 뜯어고쳐 새로 만들기보다는 드러난 현상을 제거하는 식의 제한된 개혁을 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이 민주적으로 주도하고 러시아인이 지배하는 여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꿈꿨다. 이를 위해 1987년 시장 사회주의를 도입했다. 1988년 1월에는 중앙정부의 지시를 줄이고 기업의 자주적인 재량권을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국영기업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거대한 관료집단의 집요하고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경제도 계속 곤두박질쳤다. 경제성장은 1987~1988년 겨우 2~3%에 그쳤고 1989년 0%으로 떨어졌으며 1990년과 1991년에는 각각 8%와 20%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89년 3월에는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적 규모의 민주선거를 치렀으나 구관료들이 대의원의 65% 이상을 차지하는 바람에 국민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90%가 넘는 선거 참여율은 소련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 선거를 통해 혜성과 같이 등장한 보리스 옐친(1931~2007)은 머지않아 개혁 피로감에 지친 고르바초프의 바통을 이어받아 천지개벽의 화룡점정 역할을 했다. 옐친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고르바초프가 경천동지할 변화를 이끌어도 식량 부족 등 경제위기가 해결되지 않아 대중적 인기가 하락한 것과 달리 발 빠르게 변화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년 내 고르바초프를 역사 뒤편으로 밀쳐내고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의 이런 반응과는 별개로 1989년 12월 3일, 레이건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와 지중해 몰타에서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인류가 맞이할 새 세계의 등장에 주역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련 국내 사정은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 밖에서는 고르바초프에 열광적으로 환호

분명 고르바초프의 민주화는 국민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선거를 통해 광범한 지지와 참여를 촉발했지만 개혁과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경제개혁의 실패, 당과 정부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신, ‘글라스노스트(개방·정보공개)’의 부작용 등이 몰락의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소련을 구성해온 각 공화국들의 분리운동도 몰락을 가속화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대의원 선거를 통해 소련 최초이자 최후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은 여전히 그를 외면했다. 이와 달리 해외에서는 ‘신사고’ 기치 아래 탈이데올로기와 탈군사화를 추진하는 고르바초프에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또 다른 날개 ‘글라스노스트’는 해빙 무드를 몰고 왔다. 언론 자유가 크게 신장되고 관료들의 구각이 벗겨나갔다.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브레즈네프의 정체에 비난이 쏟아졌으며 정치범은 풀려났다. 특히 외교에서의 거침없는 행보는 세계사를 다시 쓰게 했고, 세계 지도를 여러 차례 손질하게 했다.

‘중거리 핵전력(INF) 폐기조약’(1987.12)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START)’(1991.7)에 조인하고, 유엔에서는 병력 50만 감축 선언(1988.12)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유럽을 옥죄어온 소련의 사슬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의 구 정권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독일은 통일되었고 중국과는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우리나라와는 85년 만에 수교를 재개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고르바초프는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개혁의 키를 공산당에서 찾았다는 게 한계이고 비극

그런데도 소련의 국내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가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민주화의 진전과 완전한 시장경제의 조속한 실시를 요구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가 동구와 독일을 넘겨주고 소련의 안보를 위험스러울 정도로 약화시켰다고 비난했다. 결국 변화의 속도를 늦추거나 되돌리려는 사람들과 완전한 민주주의와 사기업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고르바초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1991년 8월 우려한 대로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3일만에 진압되었다. 쿠데타 실패는 소 연방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고르바초프가 시동을 건 개혁·개방은 곧 그가 통제할 수 없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속도는 시대정신에 추월당하고 소련 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결국 1991년 12월 21일 러시아 등 소련 내 11개 공화국이 소련을 부정하는 ‘독립국가연합’ 결성 협정에 조인했다. 고르바초프는 나흘 뒤인 12월 25일 “나는 이제 우려와 함께 여러분의 지혜와 신념의 강인함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갖고 떠난다”는 마지막 연설을 하고는 총총히 크렘린궁을 떠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거인치곤 쓸쓸한 퇴장이었다.

미국의 한 여류 문명비평가는 고르바초프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공산주의 역사의 휴지통에 내던져진 최후의 공산주의 로맨티스트, 세계를 변화시켰지만 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남자였다”. 개혁의 키를 공산당에서 찾았다는 것이 그의 한계이고 비극이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