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립협회, 첫 만민공동회 개최

1898년 3월 10일, 종로 보신각 앞마당에 신분을 초월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첫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1만 명의 참가자는 당시 서울인구가 17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파였다.

부산 영도를 조차(租借)해 극동함대의 석탄 공급기지로 삼으려는 러시아의 침략야욕을 규탄하고 아관파천 후 무력해진 친러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이 날의 집회 목적이었다. 이미 1월 초에 러시아 수병들이 영도에 상륙하고, 조선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한러은행까지 개설된 후였지만 독립협회는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었다.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음에도 친러정부가 조차를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독립협회가 부득이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백목전(옷감파는 상점) 다락을 연단삼아 이상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민중의 항의가 봇물터지듯 쏟아졌다. 이승만 등 청년 연사들은 열변을 토해 민중들의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냈다. 참가자들은 이미 허가한 러시아 저탄소 조차를 취소할 것과 한러은행의 철수를 요구했다. 충격이 적지 않았을텐데도 고종과 러시아는 민중의 요구에 그대로 응했다. 역사 이래 국민의 평화적 대중 정치집회가 평화롭게 목적을 성취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고종과 조정은 두달 후 서재필을 추방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7월에는 전국의 보부상을 하나로 묶은 ‘황국협회’를 발족시켜 상황의 변화를 기다렸다. 10월 28일부터 6일간 계속된 제2차 만민공동회는 고종에게 올린 ‘헌의6조’에 고종 스스로 5조를 덧붙여 재가·공포토록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언제까지 물러설 고종이 아니었다. 익명의 역모 고발사건을 빌미삼아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과 독립협회 혁파령을 내린 것이다. 만민공동회의 좌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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