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이타이이타이병 환자, 카드뮴 배출 기업 고소

일본의 1950년대∼1960년대는 기적적인 경제발전으로 고도성장을 구가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환경재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시기이기도 했다. 1953년, 규슈 남서쪽에 있는 작은 어촌 미나마타에서 처음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미나마타병’이 대표적인 경보음이었다. 메틸수은이 인근의 화학비료공장에서 배출된 폐수에 섞여 강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주민들이 그곳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먹어 수은중독을 일으킨 것이다. 정부와 공장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동안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1100여 명이나 되고, 1만 여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도야마현 진즈가와에도 1910년대부터 사람들이 “이타이 이타이(아프다 아프다)”를 호소해온 공해병이 있었다. 기침만 해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뼈가 약해지고 뼈의 위축으로 키도 20㎝나 작아지며 피부가 검게 변하는 ‘이타이 이타이병’이었다. 1957년, 한 의사가 상류의 미쓰이 금속광업을 원인 제공자로 지목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원인도 모른채 고통을 참으며 죽어갈 뻔했다. 의사의 노력으로 상류의 미쓰이 금속광업이 배출한 폐광석 속의 카드뮴이 광산폐수와 함께 흘러들어가 농작물, 어패류, 상수원 등을 오염시킨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오염된 곳에서 생산된 쌀의 카드뮴 농도는 다른 지역보다 10배 이상 높은 0.68ppm이나 되었다.

참다못한 환자와 가족 28명이 카드뮴을 배출해 온 미쓰이를 상대로 1968년 3월 9일 총액 60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7차에 걸친 소송 끝에 1971년 6월 “미쓰이 가미오카광업소로부터 배출된 카드뮴이 원인”이라는 재판부의 판결을 끌어내고, 1972년 8월 나고야법원이 회사 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승소 판결을 확정함으로써 피해자들은 뒤늦게나마 억울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56명이나 숨진 뒤였고 그때까지도 수백 명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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