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2-① : 진정한 인류애의 발로인가 전쟁 승리 위한 정치적 승부수인가

↑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할 때 모습 그림 (1863년 1월 1일)

 

by 김지지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도의 존속과 폐지를 둘러싸고 시작된 남과 북의 갈등이 마침내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폭발한 내전이다.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나 노예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노예제 종식의 주역으로 꼽히는 인물이 링컨이다. 전쟁 중 노예해방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북전쟁 하면 노예해방을, 노예해방 하면 링컨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노예제에 대한 남북간의 상이한 인식이 전쟁을 촉발한 외형상의 이유였기 때문에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이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과거에는 링컨이 진정한 인류애의 발로에 따라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으로 학교에서 가르쳤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남북 간의 이질적인 산업 구조와 이해관계의 상충이 개전의 근본 이유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인들은 휴머니즘에 불타는 정의의 화신으로, 전쟁에서 패한 남부 농장주는 탐욕적이고 악질적인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하지만 요즘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미 연방 유지와 남북전쟁 승리를 위한 링컨의 정치·전략적 승부수로 분석하는 설명이 적지 않다. 즉 링컨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그 시대의 적극적 노예해방론자들과 달리 일정한 유예기간과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거쳐 노예를 자유인 신분으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긴 온건파였는데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 목적과 적극적 노예해방론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전쟁 중 노예해방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서 흑인 노예제가 어떻게 유지되었고 링컨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본다.

 

미 흑인 노예들의 수난사

1619년 8월 어느 날, 아메리카 서인도제도 도밍고 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20여 명이 네덜란드 배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1607년 영국이 미국 버지니아 주에 건설한 미 최초의 식민도시 제임스타운이었다. 선장은 흑인들을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에게 팔아넘겼다. 이 흑인들이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딘 흑인은 아니었지만 식민지 정착촌에 최초로 거주하게 된 흑인들이었다.

‘흑인은 곧 노예’라는 오늘날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당시는 ‘흑인이라도 세례를 받으면 노예가 아니다’라는 영국법에 따라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었다. 다만 일정 기간 백인 주인을 위해 일해야 했기 때문에 ‘계약하인’ 성격을 띠었다. 계약하인 중에는 소수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도 있었다.

제임스 타운 위치  (출처 위키피디아)

 

1640년 흑인 1명과 백인 2명의 계약하인이 주인집에서 도망치다가 붙잡혔다. 법원이 백인에게는 의무기한을 4년 연장한 것과 달리 흑인에게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 어디서든 주인을 섬겨야 한다”고 판결함으로써 흑인 계약하인은 사실상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 1654년에는 존 케이서라는 흑인에 대해 백인 당국이 ‘주인의 영구적 재산’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공인 노예로 기록되었다.

‘노예’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62년 버지니아주법이었다. 이 법은 노예 어머니의 자녀는 아버지가 누구든 노예 신분이 된다고 규정했다. 당시는 이 규정 말고도 ‘한 방울 규칙’이라는 게 있었다. 흰 피부색, 푸른 눈, 금발인 사람이라도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고 섞여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규칙이었다.

그 무렵 버지니아 주에서는 담배와 면화산업의 번창으로 값싼 흑인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자 유럽의 상인들이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상인들은 1680년대부터 서아프리카 해안지방으로 가서 흑인을 직접 납치하거나 흑인 부족장에게 총과 실탄을 주는 대신 흑인을 넘겨받아 미국에서 사탕수수, 담배, 목화 등과 교환했다. 이른바 노예를 둘러싸고 진행된 삼각무역이었는데 이런 형태의 흑인 노예무역은 1808년 미국 법으로 해상 노예무역이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흑인들은 주로 미국 남부 농장으로 팔려나갔고 이 때문에 남부에서는 흑인 수가 급증했다. 버지니아 주의 경우 1680년 인구 대비 흑인의 비율이 7%에 불과했으나 1750년에는 44%나 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목화와 담배 등을 재배·가공하는 대규모 농장에 투입되었다. 흑인이 많아질수록 흑인 통제법은 더욱 강화되었다. 3명 이상 한곳에 모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일부 주에서는 흑인에게 읽고 쓰는 교육을 금지했다.

그러자 백인 사회 일각에서 노예제도의 비윤리성을 비난하는 의견들이 많아졌다. 결정적으로 백인을 각성시킨 것은 18세기 들어 유럽에 널리 유행한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천부인권과 자연권 사상은 물론 자유와 평등 이념까지 미국에 전파되면서 계몽주의에 심취한 미국의 지식인들은 노예제에 혐오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1750년대부터는 노예제가 사회악이므로 궁극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독립전쟁은 흑인의 신분 변화에 중대 전환점

그러던 중 일어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1775~1783년)은 흑인의 신분 변화에 중대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전쟁 초기, 흑인 노예들은 흑인을 전투병으로 받아들인 영국 쪽을 선호해 영국군에 입대했다. 영국은 1779년 노예해방 선언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미국도 참전 흑인에게 종전 후 자유를 준다고 발표함으로써 다수 흑인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였다. 독립전쟁 중 약 1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자유를 얻은 것은 5000여 명의 흑인 전사자가 뿌린 피의 결과물이었다.

미국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가 그린 ‘피어슨 소령의 죽음’(1783년). 흑인 자유 노예가 독립전쟁 중 영국군 소령 프랜시스 피어슨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그러나 남부 지역의 흑인 대부분은 종전 후 다시 노예 상태로 돌아갔다. 반면 농업보다는 공업이 발달해 노예가 많지 않은 북부 지역은 종전 후에도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이었다. 북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던 1777년 버몬트 주가 미 연방 최초로 노예제를 금지했다. 이후 25년간 델라웨어 강 이북의 모든 주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독립 후 1789년 제정된 연방 헌법에서 흑인의 법적 지위나 권리에 대해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양심적인 북부 지역의 백인들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다만 노예제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어느날 한 순간에 자유인의 신분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독립전쟁 후 공식적으로 조사된 1790년 통계에 따르면 북부 흑인은 약 4만 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2.1%였고 남부는 65만 명으로 33.5%였다. 전국적으로는 미국 전체 인구의 17.8%였다.

북부 지역이라고 해서 모든 노예가 자유인 신분을 획득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북부는 노예들의 해방구였다. 반면 대다수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남부 주에서 노예제 폐지는 언감생심이었다. 대규모 면화·담배 농장이 산업의 근간인 남부에서 노예제는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사회를 지탱해주는 필수 제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의 발명가 엘리 휘트니가 1793년 발명한 ‘조면기(목화씨를 뽑는 기계)’와 그 무렵 폭발적으로 팽창한 영국의 면방직 공업으로 미국 남부의 목화(면화) 산업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남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흑인 노예일 수밖에 없었고 노예제가 없는 남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많은 남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의 땅인 서부로 이주하면서 남부 입지가 점차 악화되었다.

게다가 북부 사람들이 노예제 폐지를 외쳐대니 남부의 경제 기반이 뿌리째 뽑히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부에 대한 남부의 반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전원적이고 농업 위주인 남부와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인 북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미국 내 흑인, 70만 명(1790년) → 119만 명(1810년) → 400만 명(1860년)으로 급증

노예제 페지론자들의 주장은 19세기 들어 더욱 힘을 발휘했다. 1819년 기준 총 22개주 가운데 자유주는 11개주로 늘어났다. 여기에 북위 36도 30분 이북은 자유주, 이남은 노예주로 한다는 1820년의 ‘미주리 타협’도 자유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내 흑인 수는 계속 증가했다. 70만 명(1790년), 119만 명(1810년)의 추이를 보이다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1860년에는 4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중엽에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하는 몇 가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판결, 캔자스의 유혈사태, 백인 노예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의 연방 병기고 무력 점거,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발간 등이다.

해리엇 비처 스토

 

‘톰아저씨 오두막집’ 초판본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1852년)은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히 그려내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북부에서는 출간 즉시 칭송과 찬사가 이어졌으나 남부에서는 금서로 지정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이 백인 주인을 상대로 제기한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재판’ 결과는 북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 재판에서 “흑인은 노예든 자유인이든 미국의 시민이 될 수 없으며 연방의회는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 한 연방대법원의 판결(1857년)은 오늘날 미 연방대법원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수치스러운 판결로 꼽힌다.

드레드 스콧

 

백인 노예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은 1856년 피의 캔자스 사태(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주민들끼리의 폭력사태) 때 몇몇 전투를 지휘하고 1859년 버지니아 주 하퍼즈페리의 연방정부 무기고를 무력으로 점거했던 극렬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결국 아들은 무기고 점거 현장에서 사살되고 자신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남부인들은 존 브라운의 행동을 노예 반란을 조장하기 위한 북부인들의 계획으로 간주했다.

존 브라운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북전쟁으로 가는 신호탄

이런 가운데 노예제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 11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링컨이 확보한 180명의 선거인단 중 남부의 선거인단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링컨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 가는 신호탄이었음은 곧 밝혀졌다.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 각 주에서는 즉각적으로 징병을 시작하고 북부의 반노예주의자들은 “분단만이 길”이라고 외쳤다. 사실 링컨은 기존의 노예제는 용인하되 노예제가 더 확산하는 것을 반대하는 온건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바로 노예제 폐지를 시도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후보 보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인들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남부 지역은 링컨이 취임(1861년 3월 4일)도 하기 전에 연방 탈퇴를 감행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맨 처음 탈퇴를 선언하고 뒤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7개 주가 줄줄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미국 역사의 본고장으로 인정받는 버지니아 주도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다.

노예제 유지를 고수하는 남부의 주들은 남부연합 정부를 구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 지역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국기도 새로 만들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미 연방에는 동북부와 태평양 연안 서부에 23개 주(州)가 있었고 남부 연방에 13개 주가 있었다. 주 자격을 얻지 못한 중서부 지역의 territory 즉 준주(準州)도 여럿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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