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2-② : 링컨의 최우선 관심사는 노예해방 아니라 미 연방(聯邦) 유지…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였다.

↑  노예해방 선언 후 조직된 흑인부대

 

by 김지지

 

링컨은 실행 가능성을 우선한 현실주의 정치가

내연하던 전쟁은 링컨이 취임하고 한 달여 만인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부의 급진 정치인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당장 노예해방을 선언하라고 촉구했다. 군인들도 남부 지역의 노예를 해방시키면 이들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며 즉각적인 노예해방을 건의했다. 그러나 링컨은 꿈쩍도 하지 않고 미온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링컨의 주된 관심이 당장의 노예해방 보다는 연방 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연합군이 섬터 요새를 점령한 후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1861년 4월 15일)

링컨이 노예해방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그동안 링컨의 발언이나 연설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링컨이 연방 하원의원이던 1848년 노예제를 반대하는 의원들이 워싱턴시 안에서 노예제를 불법화하자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 링컨은 부표를 던졌다. 연구자들은 이때부터 링컨이 정면충돌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중도노선을 걸었다고 분석한다.

1854년 10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한 연설에서는 “나는 남부 사람들에 데해 편견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노예제가 있다면 우리도 당장 그것을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이 내게 주어진다 해도 나는 기존의 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겁니다”라고 연설함으로써 당장의 노예제 폐지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1858년 9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선거 유세 때는 노예제도를 비판해 노예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긴 했으나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라고 연설함으로써 백인과 흑인이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중을 드러냈다. 링컨은 이 연설말고도 “남부 지역의 노예를 무조건적으로 즉시 해방시킬 생각은 없습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처럼 링컨은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남부 지역의 노예를 바로 해방시킬 생각이 없었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재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에서 그것의 존폐 여부를 둘러싼 논의에 간섭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할 만한 법적인 권리가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의 연방으로 미국을 유지하는 것이지, 노예제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연설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

링컨 대통령 취임식. 1861년 3월 4일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링컨을 향해 급진적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당장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뉴욕 트리뷴’지 대표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가 지면을 통해 대통령을 공격하자 링컨은 1862년 8월 22일 그에게 “이번 전쟁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연방을 지키는 것이다. 노예제도를 유지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또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야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일부의 노예만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방법으로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일도 할 것이다. 내가 노예제도나 유색인종과 관련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방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답장으로 보냈다. 자신의 주된 관심이 노예해방에 있지 않고 연방의 수호와 유지에 있음을 확실히 한 것이다.

 

노예해방 선언했어도 노예들 당장 해방시키지 못해

이처럼 링컨이 생각한 자신의 최우선 사명은 당장의 노예해방보다는 분열 위기에 놓인 연방을 유지하고 하나의 국가로 재출발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자신이 연방을 지키고 노예제의 확산을 막는다면 적당한 때에 노예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믿었다. 당시 남부 연방에는 백인 550만 명과 노예가 350만 명이 있었다. 북부 지역의 인구는 1850만 명이나 되었는데도 흑인 노예는 거의 없었다. 노예주도 자유주도 아닌 경계주에는 자유민이 250만 명, 노예가 50만 명이었다. 합산하면 미 전역의 노예 숫자는 약 400만 명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을 주저하고 있을 때 개전 초기의 애국심과 열기가 식으면서 군인들을 징병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활용할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렇다고 링컨은 자신의 소신을 접고 무작정 노예해방을 선언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연방에서 탈퇴하지 않으면서도 노예제를 유지하는 주들을 의식허지 않을 수 없었다. 링컨은 너무 성급하게 노예해방을 선언하면 이 주들마저 남부연합으로 넘어가 연방이 영원히 파괴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확실한 승기가 필요했다. 그때 노예해방을 선언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링컨은 계속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황이 유리해질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중 1862년 9월 앤티텀 전투에서 연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앤티텀 전투 장면 그림

 

링컨은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해 9월 22일 “반란 중에 있는 남부가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해당 주의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겠다”고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바꿔 말하면 “남부의 반란 주가 연방으로 돌아오면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된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델라웨어,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의 경계주와 테네시, 버지니아, 루이지애나 등 북군이 점령한 여러 주의 노예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노예해방 예비선언 후 전황은 북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흑인의 이탈로 남부 연합의 전력이 약화되고 남부 연합을 지원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참전 명분 역시 사라졌다. 링컨은 결국 남부가 연방으로 복귀하지 않자 1863년 1월 1일 오후 2시 노예해방 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노예해방을 법적으로 공식화했다.

그렇다고 노예해방 선언이 당장 남부의 노예를 해방시킬 수는 없었다. 해방 대상이 남부 연합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남부 지역을 점령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점에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고도의 정치경제적 전략이었다. 그래도 전쟁 기간 중 북부 연방군 전 병력의 9~10%인 약 18만 명의 흑인이 참전하고 이 가운데 3만 7000여 명이 전사했으니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충분한 효과를 본 셈이다.

결국 남북전쟁은 인류가 겪은 수많은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이권과 경제 문제로 인해 촉발된 전쟁 중 하나일 뿐 노예해방만을 목적한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남북전쟁에 흑인의 인권문제가 다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을 촉발한 근본적인 문제는 북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남부 지역의 산업 구조와 이를 지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흑인노예의 절박함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할 때 모습 그림 (1863년 1월 1일)

 

‘위대한 해방자’ 이전에 ‘위대한 지도자’

그렇다면 링컨을 노예해방의 선구자로 생각해온 우리의 인식에 일정 부분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의 역할을 부각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링컨이 도덕적인 가치만을 중시한 인물이 아니라 실행 가능성을 우선한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링컨은 의원 시절 표를 주고받아 소수 의견을 통과시키고, 의사 정족수에 미달시켜 다수 의견의 통과를 저지했으며 적절한 때 적절한 선언으로 상대의 동원력을 무력화했던 현실 정치가였다. 전쟁 중 노예해방을 선언하라는 강경파의 집요한 요구에도 링컨이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며 때를 기다린 것은 그가 현실정치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이 해야할 임무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설정하고 원칙에 충실했다. 자칫 노예해방을 급히 서둘렀다가 연방이 위기에 처하고 급기야 분열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의 판단에 연방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고착화되면 남부의 노예는 영원히 노예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린 링컨의 판단은 옳았다. 전쟁에서만 승리하면 노예해방은 어차피 곧 해결될 사안이었다. 따라서 링컨은 ‘위대한 해방자’ 이전에 ‘위대한 지도자’였다.

연방의 승리가 분명해지자 링컨은 미 전역에서 노예해방을 추진하는 헌법수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노예제도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수정헌법 제13조가 1864년 4월 연방의회 상원(1864년 4월)과 하원(1865년 1월)을 통과해 각 주의회의 비준 절차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보름만인 1865년 4월 14일 연극관람 중 남부인에게 피격되어 이튿날 사망함으로써 수정헌법 제13조가 발효되는 순간을 보지는 못했다.

종전 후 ‘민권법’ 제정으로 노예해방을 구체화한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소멸한 ‘노예법’ 대신 ‘흑인단속법’을 새로 제정·강화했다. 흑인단속법은 흑인들에게 자유 시민과 노예의 중간 정도의 지위를 부여한 법으로 흑인들의 투표권, 직업 선택의 자유, 소유권 등을 제한했다.

링컨이 서명한 헌법 제13조

 

그러자 북부를 중심으로 한 연방의회 의원들은 수정헌법 13조의 비준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865년 12월 6일 조지아주 의회가 전체 36개 주 가운데 27번째로 비준하고 12월 18일 당시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에 의해 공표됨으로써 발효되었다. 미국의 수정헌법안은 4분의 3의 주 의회가 비준해야 헌법으로서 효력을 얻는다.

‘수정헌법 제13조(노예제도 폐지)’는 “어떠한 노예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판결’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또한 1870년 2월 비준된 ‘수정헌법 제15조’는 “미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 피부색 또는 과거의 예속 상태 때문에 미국이나 주에 의하여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비로소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 덕분에 남부 흑인들의 인권이 한동안 개선되었으나 1877년의 ‘틸든·헤이스 타협안’으로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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