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서울 성북구가 철거한 ‘인촌로’의 주인공 김성수에 대하여

by 김지지

 

서울 성북구가 2월 27일 기존 ‘인촌로’ 도로명판을 철거하고 ‘고려대로’로 교체했다. 인촌로는 지하철 6호선 보문역부터 고대 앞 사거리까지 1.2㎞에 걸친 도로다. 지난 2010년 4월 명칭이 붙었다. 성북구가 인촌로를 없앤 이유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 명단에 김성수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성북구는 인촌로 철거를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주민은 “고인과 후손을 모욕하는 행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성수의 삶을 조명한다.

 

인촌로로 표기된 도로표지판 (출처 성북구청)

 

전체 삶은 한국 근현대사에 빛나는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

김성수(1891~1955)는 한국 근현대사에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교육자이자 기업인이었으며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전북 고창에서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살 때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친부와 양부 양쪽의 유산 상속자가 되었다. 이런 가계 구도 덕분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기업, 학교, 언론 등 다양한 근대화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김성수는 1906년 장인이 전남 담양군 창평에 세운 창흥의숙에서 평생 절친한 친구가 될 송진우(1894~1945)를 만나 1908년 10월 함께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등학교 예비학교인 세이소쿠 영어학원과 긴조중등학교를 거쳐 1910년 4월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송진우도 같은 코스를 밟았으나 와세다대에 입학하고 4개월 뒤 조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자 “침략자 일제의 수도인 도쿄에서 공부할 수 없다”며 조국으로 돌아왔다.

평생지기 송진우(왼쪽)와 김성수. 1925년 도쿄에서

 

김성수는 일본 유학시절 훗날 동지이자 친구가 될 여러 조선인 유학생과 교류했다. 장덕수, 현상윤, 김준연, 양원모, 최두선, 안재홍, 신익희, 이강현 등이 그때 만난 친구로, 이들은 훗날 김성수가 학교, 신문사, 방직공장 등의 근대화 사업을 펼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14년 7월 귀국한 김성수는 한동안 진로를 모색하다가 1915년 4월 24세 나이로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중앙학교(현 중앙고)를 인수해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김성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1917년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12월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 계동의 근대식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

김성수는 당시 조선이 일본의 의류, 직물, 섬유 생산품의 시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간파했다.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도록 하고 한국의 직물산업을 발전시킬 방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1917년 인수한 ‘경성직뉴’와 1919년 10월 설립한 ‘경성방직’은 그 결과물이었다. 오늘날 경성방직은 순수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대규모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성방직은 1922년 김성수의 아우 김연수가 경영을 맡고부터 근대적 기업으로 변모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1919년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 때는 중앙학교 숙직실을 거점으로 삼아 각계 인사를 연결하는 역할을 막후에서 수행하고 거금의 활동자금을 댔다.

당시 중앙학원 모습
1920~1930년대에는 경성방직, 동아일보, 보성전문 경영에 힘 쏟아

3·1운동 후 어느 날 최남선의 동생 최두선이 김성수를 찾아와 총독부의 민간지 허가 사실을 전해주면서 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다. 매일신보에서 5년 7개월간 근무한 경력이 있어 신문 제작에 관한 한 최고의 안목을 갖고 있던 이상협과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진학문도 같은 제안을 했다.

김성수는 1919년 10월 9일 이상협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내세워 신문 발행 신청서를 제출한 뒤 서울 북촌의 화동에 위치한 구중앙학교 교사를 빌려 ‘동아일보 창립사무소’ 현판을 내걸었다. 김성수는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는 독립운동’임을 강조하며 전국의 유지들을 설득했고 전국에서 78명이 주식을 인수했다. 1월 14일 동아일보 발기인 총회를 열어 사장에 박영효, 편집감독에 유근·양기탁 등 주요 인선을 결정했다.

창간 주역들은 당초 3·1 운동 1주년인 3월 1일자로 첫 호를 낼 예정이었으나 당초 목표했던 자본금이 채워지지 않아 결국 창간 마감일인 3월 5일을 넘기고 말았다. 발행 연기 신청서를 다시 내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타블로이드 배대판인 전지판 8쪽이었다. 이후 7년 동안 구중앙학교 교사에서 신문을 발간하다가 1926년 광화문의 신축 건물로 사옥을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성수는 1932년 6월 재정난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뤘다. 보성전문은 해방 후인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승격되었다. 김성수가 학교명을 ‘고려’로 정하기 전 후보로 오른 학교명은 보성, 조선, 고려였다. 검토 과정에서 보성은 전문학교 때의 이름이어서 대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되고 조선은 개국 당초부터 끝까지 국토 내에서만 우물쭈물하고 세력이 밖에까지 미친 적이 없어 탈락했다. 고구려는 한때 요동에까지 세력이 팽창한 활달한 기상과 불패의 정신을 인정받아 낙점되었으나 3자명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구’를 빼고 ‘고려’로 정해졌다.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을 둘러보고 있는 김성수( 1934년). 인촌기념회 제공

 

대법원,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 인정

김성수는 일제 말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에 펴낸 ‘친일인명사전’의 ‘김성수’ 항목에 친일반민족행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 교장이던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납부하는가 하면 1938년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어용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등으로 일하면서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물론 인촌이 이런 단체에서 어떤 활동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각종 일제 당시의 문헌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조선인 대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나가라고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 자에 실린, ‘학도(學徒)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시리즈 세 번째로 쓴 ‘대의(大義)에 죽을 때 황민(皇民) 됨의 책무(責務)는 크다’는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수 측은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게재된 글은 김성수가 쓴 것이 아니라 대필자의 작문이라면서 원로학자들이나 당시 보성전문학교 제자들은 한결같이 “인촌 선생이 학병에 나가라고 한 사실이 없다”고 또렷하게 증언하고 있다며 항변했다. 그래서 법원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은 2017년 4월 판결을 통해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확정했다. 정부는 2018년 2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김성수가 1962년에 받은 건국공로훈장을 56년만에 박탈했다.

김성수 동상. 고려대 교정에 있다.

 

이승만의 초대 내각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에 격분해 사임

김성수는 일제 하에서 교육, 언론, 산업의 세 방면을 통해 민족운동을 이끌었기에 해방 후 그에 대한 이미지는 정치와는 멀었다. 그 역시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랬기에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이 창당했을 때 김성수는 정신적·이념적으로는 당을 지원하면서도 당원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당의 수석총무이던 송진우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되고 한민당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946년 1월 한민당의 수석총무가 되었다.

김성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으면 소련과 북한에 의해 공산화되고 말 것이라는 이승만의 건국 노선을 지지했다. 김성수와 한민당의 이런 지지가 있었기에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작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1948년 5월의 초대 총선 후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초대 국무총리에는 김성수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한민당의 영향력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데 한민당이 기여한 사실을 감안하면 김성수는 국무총리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고 한민당 의원들을 각료 구성에서 배제했다.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인 김성수는 한민당과 논의한 끝에 재무장관직을 거절하고 제1야당의 당수로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기로 했다. 이승만의 권력이 1948년 8월 대한민국 출범 후 더욱 강화되자 김성수는 이승만의 전횡을 견제하고 당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한민당, 신익희의 대한국민당, 지청천의 대동청년단을 합쳐 1949년 2월 거대 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했다.

부통령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그러나 민국당은 이승만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이승만의 독선과 독단은 6·25 전쟁 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시영 부통령이 대통령 측근의 부정 사건에 격분해 사임하자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김성수는 거절했으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에 1951년 5월 부통령직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에 격분, 1952년 5월 사임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의 독단적인 통치에 맞서 반 이승만파를 규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1955년 2월 18일 운명하는 바람에 결실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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