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제 통감부 민적법 공포

조선의 호적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1896년 갑오개혁 입법의 일환으로 호구조사규칙(9월 1일)과 호구조사세칙(9월 3일)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근대적인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부역과 징세의 행정편의가 법의 주목적이었던 탓에 가족의 신분 변동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호(戶)를 구성하는 기준이 호주와 혈연관계에 있는 친족이 아니라 동거여부에 따라 결정되다보니 호주의 직계존속이나 직계비속이라도 동거하지 않으면 호적을 달리했다. 따라서 장남이라도 부(父)와 함께 살지 않는 경우에는 부와 다른 호적에 기재되고, 후에 호주인 부가 사망해도 장남이 부에 이어 그 호의 호주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법에 손질이 가해진 것은 일제 통감부가 현행 호적법의 효시가 되는 ‘민적법(民籍法)’을 제정한 1909년이었다. 3월 4일 공포되고 4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민적법의 등장으로 우리 손으로 만들었던 호구조사규칙은 폐지되었다. 민적법의 등장으로 거주단위로 편제되었던 전통적인 호적제도는 폐지되고 가(家)와 가에 속한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신분등록제도가 갖추어졌다. 또 호적에서 호주의 사조(父·祖父·曾祖·外祖)와 직업을 기재하는 난이 완전히 폐지되고, ‘본적(本籍)’이란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처럼 가의 구성원과 호주의 관계가 명시됨으로써 부모자녀관계, 형제자매관계, 조손관계 등으로 파악되었던 우리 민족 고유의 친족적 신분관계는 호주와 가족관계라는 일제(日帝)의 방식으로 새롭게 편제되었다. 민적법은 성씨에도 영향을 미쳐 성(姓)이 없던 대다수 하층민들이 호적을 신고할 때 자신이 선택한 성도 함께 신고하도록 함으로써 새 삶의 기회를 제공했다. 통감부는 민적법의 목적이 법률상으로 개인의 신분관계를 명확히 하고 전국의 호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조선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은밀한 계산도 깔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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