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고교 평준화 발표

1973년 2월 28일, 획기적인 고교입시제도 개선안이 발표되었다. 실업계와 2부(야간) 고교는 종전처럼 학교별로 선발하되 인문계 고교와 마찬가지로 연합고사로 시험을 치르고, 인문계 고교는 학군제를 채택해 연합고사를 실시한 뒤 추첨을 통해 학교를 배정한다는 발표였다. 실업계 고교가 전기이고 인문계 고교가 후기인 것도 생소했지만 무엇보다 인문계 고교를 평준화시켜 지나친 경쟁을 지양한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입시교육으로 인한 중3병, 고교 간 교육격차 심화, 재수생의 누적과 과열과외 등의 문제가 신문지상에 수시로 오르내려 진작부터 필요성이 제기된데 따른 고육지책이었지만 사립고까지 평준화에 포함시켜 논란이 일었고, 명문고 출신 인사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지만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돌아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인 지만의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아 생겨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해 3월 13일 확정된 입시안에 따라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 시행되고 이듬해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 실시되면서 새 입시제도는 그런대로 정착하는 듯 했다. 그러나 평준화 정책에 대한 조직적인 반발과 부작용이 다시 불거져 다른 지역으로까지는 확대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한국교육개발원의 2차례에 걸친 보고서가 나온 뒤에야 1979년 대전·전주·마산·청주 등 7개 도청 소재지, 1980년 성남·원주·목포·안동 등 8개시로 확대되어 7대 광역시를 포함 23개시가 평준화 지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부터 학교의 학생 선발권,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른 중앙의 획일적 통제를 배제하고 주민의 희망에 따라 교육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됨에 따라 1990년 안동·군산·목포가, 1991년 춘천·원주·이리가 평준화 지역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탓인지 지금까지도 “1등도 꼴찌도 없는 ‘붕어빵 교육’” “단군 이래 최대 학력저하” 등의 주장을 둘러싸고 여전히 논란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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