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독립유공자 서훈 검토 중이라는 김원봉에 대하여

by 김지지

 

국가보훈처가 2019년 김원봉에게 건국훈장 서훈을 검토하다 중단했다. 독립운동가이지만 북한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을 지냈고 6·25전쟁 공로로 김일성에게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서훈자가 될 수 있느냐는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 정권 관련 인물은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배제하는 게 원칙이었다. 김원봉의 삶을 추적해본다.

 

의열단 투쟁, 1920년대 내내 일제 간담 서늘케 해

1910년 망국 후 조선의 무장 독립군이 주로 활약한 곳은 만주의 동북 3성이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면서 만주는 더 이상 독립군들의 활동 무대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독립군은 만주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항일 투쟁을 벌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뒀다. 하지만 결국에는 힘에 부쳐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중국 본토에서 창건한 최초의 독립군 부대는 1938년 10월 창건한 조선의용대다.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출범(1940.9)하기 2년 전이었다.

조선의용대 결성의 일등 공신은 김원봉(1898~1958)이다. 일제 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펼칠 때 김원봉은 “임시정부 몇 개를 세우면 뭐하나”라며 즉각적인 투쟁을 우선하는 불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의열단원 정이소의 수형 기록카드에서 밝혀진 의열단 창립 초기 멤버들의 단체 사진. 오른쪽부터 김원봉·곽재기·강세우·김기득·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고 오른쪽 하단에 일경이 따로 붙여 놓은 김익상의 사진이 있다.

 

김원봉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중앙고를 거쳐 1916년 독일인이 운영하는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에 입학했다. 1차대전 발발로 학교가 폐쇄되자 1918년 금릉대(남경), 1919년 신흥무관학교(길림성 유하현)에서 실력을 배양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마침내 싸울 때가 되었다”며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파괴·폭파를 수단으로 하는 폭력 투쟁으로 전환했다. 1919년 11월 결성한 비밀 결사체 ‘의열단’은 그 산물이다.

1919년 11월 9일, 한 무리의 조선인 청년들이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의 한 중국인 집으로 모여들었다. 김원봉을 비롯해 윤세주·이성우·이종암·신철휴·한봉근 등 13명의 청년들은 밤새 논의를 거쳐 11월 10일 새벽 ‘의열단’을 창단하고 김원봉을 단장격인 의백으로 추대했다.

의열단은 비밀결사답게 일반 단원들은 전체 조직원 수를 알지 못했다. 회합 장소나 암호도 비밀이고 거사 후 체포될 것 같으면 자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암살 대상은 ①조선 총독 이하 고관 ②군부 수뇌 ③대만 총독 ④매국노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토호열신(악덕 지방 유지) 등 이른바 ‘7가살(七可殺)’이었다. 파괴 대상은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일본의 중요 기관 등이었다.

 

의열단, 거사 후 체포될 것 같으면 자결이 원칙

의열단의 첫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한 이른바 ‘밀양폭파사건’이었다. 그러나 거사는 폭탄 재료를 중국 상해에서 몰래 들여와 보관하던 경남 밀양의 미곡상 집이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고, 서울에서 폭파를 준비하던 곽재기·윤세주·이성우·신철휴·김수득·한봉근 등이 1920년 6월 16일 조선인 형사 김태석 등에게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밀양폭파사건으로 불린 것은 체포된 단원 중에 밀양 출신이 많고 국내 연락 장소인 밀양에서 다수 의열단원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의 2차 거사 목표는 밀양폭파사건 동지들을 체포·고문한 부산경찰서였다. 중국인 고서 상인으로 위장 입국한 박재혁이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2층의 서장실로 들어가 중국 고서를 보여주는 척하다가 상해에서 가져온 폭탄을 던져 일본인 서장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자신도 크게 다쳐 체포되었다. 서장은 병원 치료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이 끊어졌고 박재혁은 사형선고를 받자 9일 동안의 단식 끝에 1921년 5월 10일 숨을 거뒀다.

다음 목표는 밀양경찰서였다. 임무는 김원봉의 어릴 적 친구로 밀양에 거주하는 최수봉이 맡았다. 최수봉은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최수봉은 결국 체포되어 1921년 7월 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계속된 실패에도 의열단 거사 거침 없어

계속된 실패에도 의열단의 거사는 거침이 없었다. 1921년 9월 12일에는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한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건물 2층에 폭탄을 던지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식민 통치의 심장부인 총독부에 폭탄이 터졌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으나 일경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그 사이 김익상은 포위망을 벗어나 중국 북경으로 빠져나가 다음 거사를 준비했다.

의열단은 이렇듯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는 했으나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단원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일제에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고 중형을 받은 대원만 20명이 넘고 박재혁·최수봉 두 동지는 목숨까지 잃었다. 그래도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등에 폭탄을 던지고 사이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 마루야마 경무총감 등을 암살하는 대규모 거사를 또다시 준비했다.

김원봉은 거사를 준비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차별적 테러 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 단체임을 세상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자명과 함께 1922년 말 북경의 신채호를 찾아가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23년 1월 공표된 것이 ‘의열단 선언문’으로 불리는 6,400자의 ‘조선혁명선언’이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에 새로운 활력과 투지와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의 활동이 다소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인 투쟁이었다면 조선혁명선언의 완성으로 항일투쟁 노선을 한층 정당화하고 이념적 지표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의열단은 어렵게 고성능 폭탄까지 확보하자 폭탄과 선언문을 국내로 반입해 대규모 거사를 준비했다. 먼저 김상옥이 나섰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후 10일 뒤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고 자결했다.

김지섭은 1924년 1월 5일 일본 도쿄 황궁 부근의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 1개는 불발되고 2개는 약한 폭음만 내고 폭발해 성과는 없었으나 일본 정가에 안겨준 충격은 엄청났다.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단식투쟁으로 항거하다가 1928년 2월 20일 순국했다. 의열단의 본격적인 투쟁은 김지섭의 도쿄 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후 자결한 나석주 의거는 의열 투쟁의 대미였다.

김원봉

 

암살·파괴에서 항일 군대 조직으로 투쟁 노선 변경

김원봉이 개별적인 암살·파괴에서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항일 군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변경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926년 3월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하고 6개월 동안 군사교육을 받아 항일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첫 걸음을 뗐다.

이후 중국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남경에 세웠다. 이 학교는 1932년 10월 20일 입교한 제1기생을 비롯해 1935년 4월 입교한 제3기생까지 장차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인력으로 활약할 125명의 독립전사를 길러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와 ‘중국해방 인민군가’를 작곡한 정율성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의열단(김원봉), 신한독립당(지청천),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최동오),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9개 단체가 힘을 합쳐 1935년 7월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는 서기부장(총서기)을 맡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창당의 핵심 세력이 좌파 색채가 짙고 창당 세력의 일부가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계열의 비협조와 질시, 김원봉의 독주와 전횡에 불만을 품은 지청천 계열의 이탈 등으로 출범 본래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하지만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대립하면서 중국 관내 항일 독립운동 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은 김원봉이 의도하지 않은 성과물이었다.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의 별’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통일전선운동이 남경을 중심으로 또다시 전개되었다. 민족주의자 그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이 새로 창당한 조선혁명당이 세를 규합해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선)를 결성하고 임시정부 재건에 착수했다. 사회주의자 그룹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자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등이 힘을 합쳐 1937년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결성했다.

민선은 장개석 정부와 협의해 83명의 조선인 청년을 1937년 12월 강서성 성자현 소재 중국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반에 입교시켰다. 민선은 이 청년들을 근간으로 삼아 1938년 7월 장개석 정부에 조선의용대 창설 계획안을 제출했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발대식은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열렸다. 본부대와 2개 구대로 편성한 조선의용대 대장은 김원봉, 제1구대장은 박효삼, 제2구대장은 이익성이 맡았다. 1940년 5월에는 2개 구대를 3개 지대로 개편해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 제2지대(이익성), 제3지대(김세일)로 편성했다.

조선의용대 발대식(1938.10.10). 조선의용대 깃발 뒤 가운데 인물이 김원봉이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고 20일도 안되어 중국 내륙의 거점도시인 한구, 한양, 무창 이른바 무한 3진이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중국 정부가 중경으로 천도하자 조선의용대 본부도 광서성 계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제1구대는 중국군 호남성의 제9전구, 제2구대는 호북성 제5전구 최전방으로 이동했다. 대원들 가운데 최창익·허정숙 등 18명은 조선의용대를 이탈해 중국 공산당의 활동 지역인 섬서성 연안으로 이동했다.

최창익계의 연안 이동은 수년 전부터 최창익이 제기해온 동북 노선의 연장선이었다. 중경이나 계림 등에는 조선인이 거의 없어 조선의용대가 고립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탈피하려면 조선인이 많은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만주로 이동해 그곳에서 조선인 항일 부대와 합세해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의용대원들이 중국 각지로 흩어지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이 1940년 9월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을 설치하자 좌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의용대 역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목표지는 중국 팔로군과 일본군이 대치하고 있는 화북 지방이었다. 화북 지방은 중국 북쪽의 하북성, 하남성, 산서성 지역을 일컫는 말로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면 더 많은 대원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조국과 만주 지방과도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1940년 11월 의용대 주력이 화북 이동을 결정했다.

중국 공산당도 조선의용대가 한·중·일어에 능통하고 반일 의식이 강한 용맹한 병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들 세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저런 공작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에는 최창익을 비롯해 조선인 수십 명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추진하는 한편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조청)를 결성했다. 낙양과 중경에도 사람을 보내 조선의용대원의 북상을 유도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본토에서 창건한 최초의 독립군 부대

이런 과정을 거쳐 1940년 말 김원봉 등의 본부 인원 100여 명 정도만 남고 박효삼, 윤세주 등 김원봉의 최측근을 포함해 100여 명이 각 전선을 떠나 화북행 집결지인 낙양에 모였다.

조선의용대원들은 먼저 낙양에 집결했다가 1941년 3월 낙양에서 30km 떨어진 맹진 나루터에서 황하강 도강 작전을 시작해 1941년 6월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에 있는 태항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오를 새로 정비하기 위해 1941년 7월 10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화북지대는 중국인을 상대로 한 군중집회, 일본군에 대한 선전 등 주로 무장선전대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시절 김구(앞줄 중앙) 주석과 함께. 앞줄 가장 오른쪽이 김원봉. EBS 화면 캡쳐

 

김원봉은 1940년 3월 본부 대원들을 이끌고 계림을 떠나 중경으로 이동해 1942년 5월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는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간의 대통합을 의미했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1942년 5월 18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가운데 김원봉은 1942년 10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고 12월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군무부장을 맡아 임시정부 군사 방면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항일 투쟁의 동지이자 부인인 박차정(1910~1944)을 전투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한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태항산 일대를 비롯해 화북 각지에서 선전에 열중하면서도 호가장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차례 치렀다. 그러나 거듭되는 일본군의 소탕전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근거지가 위태롭게 되고 1942년 5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졸지에 본부 없는 지대가 되자 팔로군의 정규 편제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했다. 총사령은 중국 공산당의 대리인 격인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과 박일우가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섬서성 연안으로 이동했다.

 

김원봉의 죽음 후 숙청설, 은퇴설, 자살설 등 무성해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팔로군의 동북 정진군이 만주로 이동할 때 조선의용군도 연안을 떠나 압록강변으로 이동했다. 당시 연안과 화북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남만주 지역으로 집결한 조선의용군은 1,500여 명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김두봉과 무정을 따라 압록강을 건넜으나 입국 즉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린 그들은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과 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결성, 정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허정숙 등 몇몇을 제외하고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은 6·25 전쟁 중 혹은 6·25가 끝난 후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해방 후인 1945년 12월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한동안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2월 좌익 중심의 통일전선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1947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선인민공화당으로 당명을 바꿔 당수를 맡았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22일 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친일 경찰 출신의 노덕술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게 되자 해방이 되었는데도 독립운동가가 악질 친일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에 분을 참지 못하고 꼬박 3일간 통곡했다.

해방된 후 조국에 돌아와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해방 공간에서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단독선거가 구체화하자 김원봉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1948년 4월 9일 평양을 방문했다. 연석회의가 끝난 후 김원봉은 그곳에 눌러앉아 초대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그의 월북은 가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6·25 전쟁 때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밀양의 산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노동상(1954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1957년)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1958년 9월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숙청설, 은퇴설, 자살설 등 여러 설이 무성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숙청설이 유력하다.

북한 정권 수립(1948년 9월) 초기 주석단의 모습. 오른쪽부터 북한 김일성 수상, 남로당 당수를 지내다 월북한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 김원봉(붉은 원 표시) 국가검열상이 평양의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은 남한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부인 박차정이 일제하에서 근우회 핵심 간부와 조선의용대 부녀단장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뒤늦게 건국훈장을 받은 것과 달리 김원봉은 대한민국을 등진 자발적 월북자이고 북한에서 ‘상’급 이상의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에 훈장을 줄 수 없다는 게 우리 정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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