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베트남전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 베트남전 흐름 바꾼 분수령

1968년의 ‘케산 전투’와 ‘테트 공세’는 베트남전의 흐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 21일 새벽,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온 2만 명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 특수부대 2100명이 지키고 있는 케산을 향해 장거리포를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케산은 남북 베트남의 비무장지대 부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1962년 미 공수부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병력과 물자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기지로 삼은 이래 6년 동안 별다른 전투가 없었던 곳이었다. 케산을 포위한 북베트남군의 첫날 포격으로 미 해병대는 18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포위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폭탄을 3개월 동안 무차별적으로 케산 주변에 떨어뜨려 북베트남군의 접근을 막았다. 매일 평균 400여 기의 미군 폭격기가 출격해 폭탄을 마구 퍼붓는 과정에서 미군도 900여 명이 전사하고 1600여 명이 부상했으나 북베트남군은 미군 피해의 4배나 되는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국의 관심이 온통 케산으로 집중되고 있던 1월 31일 새벽 2시 30분, 19명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게릴라들이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의 담을 폭파하고 영내로 들어가 5명의 미군을 사살했다. 이른바 테트 공세의 시작이었다. ‘테트’는 음력설인 구정을 뜻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에 투입된 미 공수부대원들이 게릴라 전원을 살해하면서 대사관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신호탄으로 남베트남의 100여 개 도시와 마을이 8만여 명의 베트콩으로부터 동시 공격을 받았다.

민간 복장을 한 4000여 명의 게릴라는 대사관 공격에 이어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 남베트남 정규군 사령부, 대통령궁 등 주요 시설을 잇달아 공격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음력설을 맞아 36시간의 휴전 제안을 해놓고 안심하고 있는 사이 테트 공세를 단행했다. 구정을 맞아 사이공에서는 남베트남 정규군의 절반이 휴가 중이었다. 미군도 1967년의 대규모 폭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북베트남이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공격해 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인들, 처음에는 경악하더니 뒤이어 냉소와 반전으로 반응

테트 공세로 인해 특히 비무장지대 부근의 옛 베트남 왕조의 아름다운 도시 후에의 피해가 컸다. ‘후에 전투’는 1만2000명의 게릴라들이 후에를 점령했다가 오히려 미군에 포위되어 26일 동안 가해진 미군의 탱크와 비행기 공격으로 5000여 명이 죽었을 만큼 처절했다. 미군 147명이 전사한 ‘후에 전투’는 미 해병대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후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테트 공세는 10일쯤 지나서 진정되었다. 2월 하순 경 미국의 웨스트모얼랜드 베트남원조군 사령관이 베트콩 게릴라 가운데 3만7000여 명을 사살하고 5800명을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8만 명 게릴라의 절반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테트 공세는 이처럼 미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는데도 언론은 미군 전사자 534명과 부상자 2547명만을 부각시켰다.

평소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미국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처음에는 경악하더니 뒤이어 냉소와 반전으로 반응했다.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뉴스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77일간이나 포위되어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케산 전투로 미국인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언론은 북베트남이 프랑스에 패배를 안겨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망령을 상기시키며 끊임없이 불안감을 자극했다.

초기에는 케산 전투를 “대규모 테트 공세를 위한 양동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국인들은 매일 저녁 TV로 케산 전투의 잔혹한 장면을 목격하면서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 북베트남의 목표는 성공한 셈이다. 그들의 목표가 케산의 포위작전을 장기전으로 끌고감으로써 미국 내에 반전운동을 확산시켜 전쟁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베트남은 디엔비엔푸처럼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만들지도 않았고, 몰아치지도 않았다.

 

전쟁이 인공위성을 타고 안방으로 파고들면서 전쟁 양상 안방전쟁으로 변모해

서구 전쟁 사상 처음으로 전쟁이 인공위성을 타고 정글에서 안방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전쟁 양상은 안방전쟁으로 변모했다. TV에 나오는 병사들의 얼굴은 멀리서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옆집 아들이고 자기 자식이었다. 언론이 반전만을 크게 취급하는 바람에 여론이 급변하자 존슨 대통령은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였다. 3월 25일의 여론조사는 미국 국민의 60%가 미국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월 31일 케산의 포위작전이 해제되었을 때 수척해진 존슨이 TV 앞에 나와 “미군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은 제한하며 평화협상을 모색하겠다”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자신은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7년 동안 국방부 장관으로 전쟁을 총지휘했던 맥나라마 장관도, 베트남 현지 주둔 미군을 지휘했던 웨스트모얼랜드 장군도 높아진 반전 여론에 밀려 2월과 3월 각각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때까지 미군 피해는 전사 1만9000명, 부상 11만5000명으로 베트남전쟁 전 기간에 걸친 피해의 40%나 되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그해 8월 초 닉슨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명예로운 평화협상을 추구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터널을 더디게 빠져나오는 바람에 또다시 애꿎은 베트남인들과 미군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후 4년 동안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논의하면서 미국은 “우리가 이 빠진 호랑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주도권 장악을 위해, 공식적으로 휴전에 이르기 전까지 폭탄을 마구 떨어뜨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1973년 1월 27일 체결된 파리평화조약은 4년 전 회담을 처음 시작할 때 논의한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끝까지 우울한 전쟁이었다.

 

☞호찌민 루트

전장이 5645㎞나 되고 도로 총길이가 1만3000㎞나 되는 ‘호찌민 루트’ 가운데 수천㎞는 북베트남을 기점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 남베트남 국경을 따라 마치 자동차의 연료 파이프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다. 남북 간 군사분계선인 북위 17도선에서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남쪽으로 11도까지 내려가면 사이공 서쪽 끝 지역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부터는 다시 작은 도로와 연결된다.

북베트남군이 17도선에서 사이공 근처까지 도달하는 데는 거의 6개월이 걸린다. 험난한 산악지대, 농촌지역, 허약한 대나무 다리들을 건너는 데 시간이 지체되기도 하지만 미군의 공습도 침투시간을 더디게 했다. 말라리아도 극성을 부렸다.

1959년 건설하기 시작한 호찌민 루트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북베트남군의 주요 통로였다.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하노이 지도자들은 북베트남 병력의 남베트남 침투를 부인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전투병력 상륙으로 전쟁이 본격화된 1965년 한 해 동안 호찌민 루트를 통해 3만6000명의 북베트남군이 남파되고 이듬해에는 9만 명의 병력이 이 루트를 이용해 침투했다. 한 기록에 의하면 북베트남군은 이 루트를 통해 약 15만 명을 남파했다. 미국은 이곳을 집중 폭격했다.

호찌민 루트를 지나는 적군 1명을 사살하는 데 100t 또는 300개의 폭탄을 투하할 정도로 대규모 물량공세를 펼쳤다. 북베트남에게는 호찌민 루트야말로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대 공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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