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 초연

지아코모 푸치니(1858~1924)는 성공을 확신한 듯 가족을 동반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극장 안은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등을 잇따라 성공시켜 이미 오페라계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의 신작을 감상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입장권에는 프리미엄이 붙고, 입장료 수입은 이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 가운데 사상 최고를 기록해 극장 측을 즐겁게 해주었다. 작곡가 푸치니에게도 2만리라의 선금이 쥐어졌다.

누구도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 가운데 1904년 2월 17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나비 부인’의 첫 막이 올랐다. 그런데 공연 시작과 함께 객석 곳곳에서 야유와 아우성이 터져나오더니 막이 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동양적 선율에 2막이 1시간 반 동안이나 지루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기모노가 바람에 부풀어 올랐을 때는 “소프라노가 임신했다”며 항의하는 관객도 있었다. 결국 초연은 관객들의 조롱 섞인 모욕과 조소를 받으며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튿날부터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고 푸치니도 선금을 돌려주어야 했다.

‘푸치니의 계속된 성공을 질시한 라이벌의 사주’라는 소문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은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푸치니가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공연 1년 전, 자동차 사고로 푸치니의 다리가 부러져 초연 날짜가 연기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인후병과 당뇨병까지 겹친 상태에서 푸치니는 어렵게 곡을 완성했으나 연습에 들어간 출연자들은 공연 전날까지도 동양의 낯선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했다.

푸치니가 19세기 말의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국 해군 장교 핑커튼과 기녀 초초상(초초는 일본어로 나비를 뜻함)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나비 부인’을 처음 대면한 것은 1900년 5월 런던의 연극무대였다. 그때 푸치니는 ‘토스카’ 공연에 맞춰 런던에 체류 중이었고, 미국 잡지 ‘센추리’에 실린 존 루더 롱의 단편소설(1898년)을 각색해 1막짜리 연극으로 만든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도 뉴욕 무대(1900년) 성공의 여세를 몰아 런던에서 공연 중이었다. 관객의 싸늘한 시선에 초연부터 처절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지만 푸치니는 작품의 일부를 고쳐 3개월 뒤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다시 무대에 올렸다. 이번에는 열렬한 갈채가 그를 맞았다. 역시 푸치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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