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1년 2월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골짜기에 총성과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이 신원면의 대현·중유·와룡리 주민 719명을 집단 학살하는 죽음의 소리였다.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것이 학살이유였다. 국군의 주장은 사건발생 두달 전인 1950년 12월5일에 400~500명의 빨치산이 신원면의 한 국군지소를 습격, 이듬해 2월7일 국군이 진주할 때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3대대는 거창양민학살에 앞서 2월8일 산청·함양군 등에서도 705명(유가족 집계)의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거창 양민학살이 외부에 처음 알려진 것은 3월 초순경 거창 군민 2명이 이 지역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였다. 신중목은 3월29일 피란국회가 열리고 있는 부산극장에 뛰어들어가 다른 의원들에게 이 참극을 설명했다. 이 날은 국민방위군 사건 특별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이 의결된 날로, 정부에 대한 의원들의 불신이 극에 달할 때였던 탓에 의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4월7일 국회 조사반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 공비로 가장한 군이 의원들을 공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했다. 4월 말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지들이 거창사건을 학살장면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자 평소 해외여론을 중시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4월24일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신성모 국방장관은 5월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장관직에서 해임됐지만 이승만은 그를 주일 대표부 공사로 보내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연대장과 대대장 등 관련자들도 그해 말 군법회의에 회부돼 3년에서 무기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뒤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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