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아서 밀러 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초연

 

1949년 2월 10일, 윌리 로먼이란 평범한 영업사원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모습을 고발한 아서 밀러의 세번째 희곡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이 뉴욕 브로드웨이 모로스코 극장에서 개막됐다. 리 콥이 주연을 맡고 엘리아 카잔이 연출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본 비평가들은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고발”, “세계 연극의 금자탑”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관객들은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를 보여주는 한 가족의 드라마에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무려 742회나 공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의 성공은 밀러에게 퓰리처상과 비평가연맹상을 선물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밀러는 곧이어 미국에 폭풍처럼 몰아친 ‘매카시즘 광풍’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찬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감상주의 또는 마르크시스트적 선전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 모욕과 경멸 속에서도 밀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살렘의 마녀재판(1692년)을 소재로 한 ‘크루서블'(1953년)을 발표하며 매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브뤼셀에서 개막된 ‘크루서블’ 공연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빨갱이’ 색출에 나선 미 의회의 비미행위조사위원회에 불려가 “할리우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목하라”는 수모를 겪었다. 밀러와 달리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출한 엘리아 카잔은 같은 위원회에 불려가 밀러를 공산주의자로 거명, 밀러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밀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56년 6월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이었다. 둘의 결혼은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위대한 육체의 결합”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2년 먼로가 자살했을 때 밀러는 그녀를 모델로 한 희곡 ‘전락’을 발표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뉴욕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밀러는 대공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접시를 닦고 부두의 하역 노동자로 일하며 혹독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때 보통 사람들의 삶을 배웠고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보통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2월 10일 그가 89세로 눈을 감았을 때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11일 오후 8시에 불을 껐다 켰다 하며 당대 최고 극작가의 죽음을 추모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