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향가연구가 오구라 신페이 사망

1944년 2월8일, 향가와 이두 연구에 독보적 존재였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62세로 숨을 거뒀다. 도쿄제국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1926년 경성제국대 교수가 되고 이듬해 향가와 이두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오구라가 학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은 향가 해독이 전무하던 1929년에 ‘향가 및 이두 연구’를 발표하면서였다.

오구라에 앞서 일본인 아유가이(鮎貝)가 처용가·서동요·풍요 3편을 해독해 1923년 조선사강좌에 소개한 것이 일본인 학자의 이두 연구의 효시였지만 본격적으로 이두를 연구한 것은 오구라가 처음이었다. 조선말이 서투른 일본 학자가 옛 조선말을 연구하기란 대단히 어려웠음에도 그는 삼국유사 향가 14수와 균여전 향가 11수 등 향가 전체에 대한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고대 조선어와 조선어 방언 등 조선어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구라의 학문적 성과에 자극받아 국학자로 변신한 이가 자칭 ‘국보’ 양주동이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양주동은 향가 해석이 일본인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에 반발, 1937년에 돌연 국학자로 변신하고 국학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향가 25수를 여러장 배껴 안방, 건넛방, 대청 심지어는 화장실 벽에도 붙여놓고 자나깨나 오며가며 향가 풀이에 골몰했다. 그 결과 청구학총 19호에 ‘향가의 해독’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1942년에는 ‘조선고가 연구’로 오구라가 평생에 걸쳐 쌓아놓은 업적을 휴지로 만들어버렸다. 오구라의 대저(大著)를 “절반 이상의 개정을 필요로 한다”며 정면으로 비판한 그의 해독은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 논리의 완벽성에서 오구라의 그것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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