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경향신문 ‘여적’ 필화

1959년 2월4일자 경향신문 고정칼럼 ‘여적(餘滴)’에 한 편의 글이 실렸다. 미국 허멘스 교수가 쓴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라는 논문에 대한 단평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내용을 문제삼아 그날 오후 편집국장을 연행해 필자를 밝힐 것을 추궁하고 이튿날 한창우 사장 앞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면서 제1공화국의 대표적인 필화사건으로 발전했다. 기사와 관련해 신문 발행인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기는 건국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주요한이 자신이 필자라고 밝히면서 잠시 주춤하던 사태가 다시 불거진 것은 2월27일 주요한과 한창우가 내란선전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였다. 정·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상황에서 비판적인 경향신문에 족쇄를 채우려는 정부의 술책이었다. 게다가 경향신문의 두 기자가 간첩사건 보도로 대간첩 수사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구속(4월4일)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해졌다.

그리고 4월30일 정부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경향신문을 폐간한 것이다. 밤 10시15분, 발행허가 취소 통지서가 전달되고 윤전기가 멈춰섰다. 6월26일 서울고법이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한줄기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감격과 흥분도 잠시뿐, 곧 정부의 변칙 공격이 가해졌다. 27일자 특집판을 한창 찍고 있던 밤 10시15분, 이미 법적인 효력을 상실한 폐간처분을 취소하고 무기정간 처분을 내린다는 정부의 통고서가 날아든 것이다. 경향신문은 행정처분 취소 본안 및 효력정치 가처분신청으로 맞섰으나 사태가 오래갔다. 이듬해 4·19가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4월26일이 되어서야 대법원이 경향신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4월27일 경향신문은 361일만에 다시 전국의 독자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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