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버트런드 러셀 사망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과 편력은 2년이 채 모자라는 100년을 살았던 그의 생애만큼이나 넓고도 깊다. 학문세계에서는 수학자․철학자였고, 사회활동에서는 반핵운동가․교육혁신가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1950년)할 만큼 문필가로서의 입지도 확고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시대의 요청에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러셀의 올곧은 삶의 궤적은 가문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상 가운데 한 명인 윌리엄 러셀 경은 찰스 2세에 모반으로 가담했다가 교수대에서 삶을 마쳤고, 총리를 두 번 역임한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선거제도의 개혁을 위해 싸웠다. 어머니는 여권주의자였고 아버지는 의회에서 산아제한운동을 벌인 무신론자였다.

1910년 화이트헤드와 공동으로 대저 ‘수학 원리’(1910년~1913년)를 펴내고 케임브리지대 교수로도 재직했던 그의 지위가 송두리째 흔들린 것은 1차대전 때였다. 징병거부단체에서 반전주의자와 탈영병을 돕다가 교수직에서 쫓겨난 것이다. 1918년에는 ‘트리뷰널’지에 레닌과 볼셰비키를 찬양하고 미군을 악의적으로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가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 소련을 방문해 레닌․스탈린 등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그들의 파벌성과 잔인함이 내 피를 꽁꽁 얼린다”며 볼셰비즘과 결별했다. 1946년에는 철학도의 필독서인 ‘서양 철학사’를 쓰는 등 평생 70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을 쓰며 학문에도 전념했지만 핵의 무분별한 남용을 묵과할 수 없어 아인슈타인과 반핵운동을 펼쳤다. 생전에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던 그였지만 나이만은 어쩔수 없었다. 1970년 2월2일 98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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