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신문만화 ‘고바우 영감’ 동아일보 연재 시작

‘고바우 영감’이 첫 선을 보인 것은 1950년 11월이다. 대구에서 발행되던 ‘만화신보’가 첫 무대였다. 작가는 1년 전 ‘연합신문’에 ‘멍터구리’를 15회 연재하면서 본격 시사만화가로의 첫 발을 내디딘 18세 소년 김성환이었다.

장차 김성환의 분신이 될 ‘고바우’가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55년 2월1일이다. 연재 초기 고바우는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유머만을 선보이다가 점차 독자들의 기호에 맞춰 시사문제에도 관여했다. 영욕의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다. ‘고바우’가 현실정치를 아프게 꼬집을 때는 여지없이 권력으로부터 반응이 왔다. 과잉충성하고 아첨하는 세도가들의 이면을 풍자한 1958년 1월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무대 똥통사건’은 고바우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이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빗대 경무대에서 똥을 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깍듯이 인사하는 당시 세태를 꼬집은 이 만화로 김성환은 문초를 당하고 과료를 물어야 했다. 5․16 후에도 군사정부와 만화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1963년 봄부터는 8개월간 붓을 놓아야했다.

결정적으로 시련이 닥친 것은 1980년 8월9일자 7971회를 끝으로 타의에 의해 폐업을 선언하고 정든 지면을 떠나야 했을 때였다. 신군부의 ‘언론계 숙정’이란 철퇴를 맞고 33명 속에 끼인 것이다. 그해 9월11일자부터 조선일보에 둥지를 틀고서야 독자들은 다시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점철된 고바우를 만날 수 있었다. 고바우는 1992년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직하고 문화일보로 옮긴 김성환을 따라 그해 9월부터 문화일보에 등장했다가 2000년 9월29일부로 영영 독자의 곁을 떠났다. 그동안 무려 1만4139회에나 연재되며 일간신문에 연재된 단일작가의 4컷짜리 시사만화 창작물로는 세계 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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