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2·8 독립선언, 피식민지 국가 유학생들이 적지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 만방에 외치다

by 김지지

 

100년 전 3·1운동을 촉발했던 일본 도쿄 2·8독립선언의 산실인 도쿄 재일본 한국 YMCA가 자료실 재개관과 기념 영상물 제작 등을 위해 일본에서 1000만엔(약 1억원)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조선인 유학생 600여 명이 일본 제국주의의 중심인 도쿄의 재일본도쿄 조선YMCA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외친 사건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조선인들이 만든 재일본도쿄조선YMCA는 당시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으로, 선언 후에는 수감된 학생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변호사를 구하며 선언 참가자들을 적극 후원했다. <세계일보 2019년 1월 22일>

 

윌슨 미 대통령의 ‘14개조 평화 원칙’ 천명 후, 우리 민족 국내외 막론하고 한껏 기대 부풀어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이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에 가담하자 한국인들은 이들 3국 협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독일이 승리해야 한국의 독립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의 승전을 갈망했다. 다행히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1916년 초 손병희 교주를 중심으로 천도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논의되었다. 1917년에는 1만여 명이 연서해 독일 수뇌부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패전과 연합국의 승전이 확실시되어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다.

낙담해 있는 우리 민족에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1918년 1월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이른바 ‘14개조 평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14개조 가운데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을 흥분시키고 열광케 한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한 5조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1918년 한 해 내내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리 민족 역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이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것도 종전 후 14개조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에 대비한 자구책이었다. 그러던 중 1918년 11월 마침내 1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1919년 1월부터 승전국과 패전국 간에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한 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파리평화회의는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과 빛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평화회의에서 논의될 윌슨의 14개조 원칙이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의 일원이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 식민지 처리에만 적용되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독립을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떻게든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승전국에 알려야 했다. 그래서 1919년 2월 1일 신한청년당이 파리로 파견한 특사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이런 사실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장덕수와 선우혁을 파견했다. 이들은 평안도·황해도에서 활동하는 양전백·이승훈·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이런 사실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권유해 적극적인 지지와 약속을 받아냈다. 일본에는 조소앙·장덕수·이광수를, 만주 간도와 러시아령 연해주에는 여운형을 파견해 만세시위운동을 권유했다.

이와 별개로 미국의 동포들은 1918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동맹회 총회에 참석, 다른 약소민족 대표들과 함께 약소민족의 독립을 결의했다. 이 사실은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발간하는 영자지에 소개되었다. 영자지에는 1918년 12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정한경과 이승만을 파리로 파견한다는 사실도 실렸다.

 

조선YMCA회관에 약 600명이 모여 독립선언식 거행

이런 사실에 크게 고무된 재일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웅변대회를 열었다. 연사로 나선 윤창석, 이종근, 박정식 등은 당시 정세가 조선독립운동의 적합한 시기라며 밤늦게까지 열변을 토했다. 뒤이어 조국 독립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최팔용·서춘·김상덕·김도연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장덕수와 조소앙이 일본 도쿄에 도착,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했다. 뒤이어 이광수도 도쿄에 도착했다.

2·8 독립선언이 거행됐던 재 일본 조선YMCA회관 모습.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라지기 전의 사진이다.

 

실행위원들은 상해에서 파견한 이광수·김철수와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발기하고 그 명의로 조선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선언서, 결의문을 작성해 일본 중의원·귀족원 의원, 일본 주재 외교관, 신문사와 지식인들에게 발송하고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근대 일본에서 처음 출현한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原敬) 정부를 상대로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광수는 하숙집에 사흘 밤낮 틀어박혀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중순 모자 안감에 이광수가 기초한 선언서를 숨기고 조선에 들어왔다. 송계백을 통해 거사 계획을 접한 현상윤이 송진우·최남선·최린에게 선언서를 보여주고 최린이 손병희·권동진·오세창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들도 독립선언 추진에 적극 찬동했다. 송계백은 정노식으로부터 운동자금 3000원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가 운동이 본격 추진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주동자 윤창석이 경찰서에 연행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이광수는 2월 5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윌슨 미국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게 자신이 번역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발송하고 중국 내 영자신문에도 실리도록 했다.

거사 당일인 1919년 2월 8일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오후 들어 폭설로 바뀌었다. 36년 만의 대설(大雪)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오전에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등을 일본의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일본의 각 언론사 등에 우송했다. 조선인은 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민족대회를 소집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도 적용하라고 선언서에서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을 향해 영원한 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약 600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사회를 맡은 최팔용은 그날의 모임을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라고 밝혔다. 백관수가 단상에 올라 문서를 펼쳤다.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원이 서명한 2·8 독립선언서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선언 낭독 후 김도연이 결의문을 읽었다. 피식민지 국가의 유학생들이 적지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친 것이다. 참가자들은 강당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가행진을 시도했다.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대회장에 들이닥쳤다. 유학생들과 경찰의 난투극이 벌어졌고, 주동자 27명이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회관 유리문이 부서지고 주동 학생들은 부상을 당했다.

2·8 독립선언 주역들이 1920년 3월 26일 도쿄형무소에서 출감한 뒤의 기념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 장영규(앞줄 맨 오른쪽), 최승만(그 왼쪽), 강종섭(뒷줄 가운데) 등 2·8 독립선언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검거를 피한 학생 중 100여 명은 나흘 후인 2월 12일 히비야 공원에서 다시 유학생 대회를 열었다. 이달 등 새로운 독립단 실행위원을 선출한 유학생들은 이곳에서 조선 독립을 외쳤다. 일경은 13명의 학생들을 구속하고 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24일에도 150여 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에 모여 민족대회 소집 촉진부 취지서를 배포했다. 경찰은 이날도 16명의 학생들을 끌고 갔다. 나머지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사본을 지닌 채 고국으로 돌아와 3·1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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