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3․1운동 발발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파고다공원으로 수천명의 학생․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기에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인근의 태화관에 있었다. 전날밤,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급히 변경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인사가 끝나자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곧 일경에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에는 손병희를 포함한 천도교계 16명, 이승훈을 포함한 기독교계 15명, 한용운을 포함한 불교계 2명 등 모두 33명이 이름이 올랐으나 당일 기념식에는 4명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다. 선언서 초안을 본 한용운이 “최남선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자신이 작성하겠다고 했으나 이미 손질이 끝난 상태여서 한용운은 공약3장만 선언서 끝에 추가했다.

그 시각, 공원에 운집한 학생․시민들은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가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만 수십만명 서울시민들의 만세시위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으나 1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만큼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비슷한 시각, 평양․의주․원산 등 이북지역 6곳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는 학생․시민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다음날부터는 함흥․해주․개성 등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되어 이북 지역은 그야말로 시위대 물결이었다. 3월 중순부터는 남한에서도 만세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는 만주․미국․중국․일본 등지로도 확산되었다.

일본 측 통계에 의하면 첫 3개월 동안 전국에서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수 202만3000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00여명, 피체 인원 4만6948명에 이르렀다. 교회 47개소, 학교 2곳, 민가 715채가 불에 탔다. 이처럼 3․1운동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이기도 했지만 중국․아시아․중동 등 다른 피압박 민족들에게도 저항운동의 길잡이가 되어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을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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