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최승희 첫 무용 발표회

한국 현대무용의 태두이자 전통 무용을 일신한 개혁가

1926년 3월 19일, 일본 근대 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가 이끄는 무용단이 서울의 경성공회당에서 순회공연을 열었다. 3일 동안 열린 공연은 ‘신무용’을 조선에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매일신보 기자 이서구는 “서양음악에 맞추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음악도 없이 타악기를 따라 반나체가 된 험상궂은 사나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공연 첫날 객석에는 15세 소녀 최승희(1911~1969)와 10살 위 오빠 최승일도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오빠는 최승희를 데리고 무대 뒤 분장실을 찾아가 이시이 바쿠에게 최승희를 무용단원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시이는 생전 처음 보는 젊은이의 요청인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훗날 ‘동양의 진주’, ‘반도의 무희’로 불리게 될 최승희의 무용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무렵 최승희의 상태는 불안정했다.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학교 측의 장학금으로 도쿄음악학교에 유학을 갈 수 있었으나 나이가 어려 입학이 보류되었다. 진로를 바꿔 모색한 경성사범학교 역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처럼 어정쩡한 시기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신극 운동을 펼치던 오빠 최승일이 동생을 이시이의 문하생으로 보낸 것이다.

최승일은 일본 니혼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20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극 연극단체인 ‘극예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22년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문학 단체인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5년 8월 ‘카프’ 결성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시이는 1911년 도쿄 제국극장 오페라 발레단 1기생으로 입단해 서양 발레리나에게 발레를 배운 일본 서양무용의 창시자였다. 1925년 도쿄 변두리에 이시이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나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빚을 많이 져 빚을 갚을 요량으로 조선 공연을 추진했다.

최승희는 1926년 3월 25일 이시이를 따라 경부열차를 타고 경성을 떠났다. 일본에서 무용단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도일한 지 3개월도 안된 6월 22일 이시이 무용단의 도쿄 공연 때 생애 처음 무대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1927년 10월에는 두 번째 내한 공연을 하는 이시이 무용단을 따라 경성으로 돌아와 25~26일 공연에서 12곡 중 5곡에 참가하고 ‘세레나데’를 독무로 췄다. 언론은 ‘조선의 꽃’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조택원은 공연에 매료되어 이듬해 이시이의 제자가 되겠다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첫 개인 무용 발표회의 성공 덕에 일본에서 유명 무용가로 입신

최승희는 이시이 문하에서 3년간 기본기를 배우고 각종 공연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최승희의 신체 조건은 남자들의 평균 키가 162~164cm일 때 165cm·49kg이나 되어 서양 춤을 추는 데 제격이었다. 피부도 희고 용모도 아름다웠다. 문제는 이시이가 빚을 갚기 위해 공연 횟수를 늘려 공연의 질이 떨어진다는 데 있었다. 최승희는 이게 불만이었다. 예술의 질을 떨어뜨리는 타협과 편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침 이시이와 맺은 3년간의 계약 기간도 끝나갔다. 그러던 중 이시이가 눈을 다쳐 집에 눕게 되자 1929년 7월 이시이와 작별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지인들이, 스승이 실명할 처지에 빠지고 연구소가 해산 위기에 놓였을 때 등을 돌렸다며 최승희를 비난했다.

최승희는 경성에 머물면서 오빠의 지인을 통해 러시아 유학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자 1929년 11월 1일 남산 기슭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1930년 2월 1일과 4일 이틀 동안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창작 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1930년 10월의 2차 신작 발표회까지 대성황을 이뤘다. 최승희는 오빠의 소개로 만난 안막과 1931년 5월 10일 결혼했다. 안막은 제2고보(경복고)를 다니다 5학년 때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안막이 1931년 8월 카프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수개월 후 석방될 무렵 최승희는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신작이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무용도 한계에 달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결국 몸과 마음이 지치고 연구소 집세도 감당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1932년 6월 이시이가 경성으로 왔다. 최승희는 이시이에게 과거 잘못을 반성하면서 다시 무용단 입단을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최승희는 1933년 3월 국내 활동을 접고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이시이 무용단에 들어갔다. 대학생인 남편의 수입이 없어 생활은 쪼들렸지만 그래도 하루 15시간 넘게 연구소에서 무용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조선 춤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마침 조선 무용의 대가 한성준이 일본에 와 있었다.

최승희는 한성준에게서 40여 가지 춤을 배우고 서양무용의 동작 원리에 조선적인 정서를 넣어 자기 식의 춤을 완성했다. 그리고 1933년 5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여성 무용 경연대회에 참가해 자신이 꾸민 조선 춤 ‘에헤야 노아라’를 선보였다. 최승희는 쏟아지는 언론의 호평에 고무되어 민족 색이 짙은 ‘검무’, ‘승무’ 등 신작을 계속 창작했다.

 

“신이 아름다움을 창조할 때 최승희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궁핍했으나 부부는 1934년 9월 20일 제1회 신작 무용 발표회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부터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부부는 낙심하며 공연장에 갔으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00여 명의 관객이 그 넓은 공연장에 빈틈없이 꽉 들어찬 것이다.

관객 중에는 언론사 대표, 주일 각국 대사, 각계 예술가들이 망라되었다. 35년 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최승희는 ‘에헤야 노아라’를 비롯해 그동안 갈고닦은 승무, 칼춤, 부채춤, 가면춤 등을 선보였다. 춤을 본 스승 이시이는 “신이 아름다움을 창조할 때 최승희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라며 극찬했다. 일본 내 첫 개인 무용 발표회의 성공 덕에 최승희는 일본에서 유명 무용가로 입신했다.

1935년에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 출연으로 거금의 출연료를 받아 생활고에서 벗어났다. 그 무렵 안막은 대학을 졸업해 개조사에 입사했으나 곧 그만두고 아내를 위해 공연 기획자의 길을 택했다. 오랫동안 키워온 자신의 꿈을 접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오직 아내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최승희를 세계 최고의 무용가로 만들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안막은 먼저 최승희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최승희 후원회’를 조직했다. 후원 인사들은 1935년 10월 22일 일본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제2회 신작 무용 발표회 유인물에 기재되었다.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 등을 비롯해 일본의 유명 작곡가, 평론가, 소설가 21명도 이름을 올렸다. 최승희는 1936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영화 ‘반도의 무희’가 조선에서 개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영화는 혹평을 받았으나 흥행은 4년 동안 일본 전역에서 롱런할 정도로 성공했다. 최승희는 화장품, 안약, 비타민, 은단, 초콜릿, 축음기 등 온갖 광고로도 돈을 쓸어 담았다.

1936년 9월 22일 제3회 발표회까지 성공하자 미국으로 진출, 1938년 1~2월 샌프란시스코, LA, 뉴욕에서 세 차례 순회공연을 열었다. 미국 언론은 “깨질 듯 섬세한 동작과 정교하고 아름다운 의상과 함께 신비스러운 매력”(뉴욕 헤럴드트리뷴), “인종적인 경계를 넘어 신비함과 섬세함을 과시한 보기 드문 예술가”(뉴욕 선) 등 찬사를 쏟아냈다. 최승희는 1939년 1월 유럽으로 건너갈 때까지 뉴욕에 1년 동안 머물며 세계적인 무용가들의 공연을 보고 배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사 참배하고 황군 위문 공연 펼쳐

최승희가 1939년 1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연 첫 공연에는 2,500여 명의 관객이 들어찼다.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초립동’이었는데 곧 파리에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다. 이후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도 공연을 펼쳐 각광을 받았다. 1939년 4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 무용 경연대회에서는 세계적인 무용가들과 나란히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영예를 누렸다. 파리 2차 공연에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시인 장 콕토, 작가 로맹 롤랑 등도 관객으로 자리를 지켰다. 당시 피카소는 객석에서 연필로 스케치한 최승희의 공연 모습을 선물로 주었다.

최승희는 1939년 9월부터 다시 유럽을 순회하는 총 60회 공연을 계획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40년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 중남미 공연을 추진했다. 1940년 5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멕시코 등 중남미 공연에서도 격찬을 받았다. 최승희가 이렇게 해외에서 공연한 것만 미국 10회, 프랑스 23회, 벨기에 9회, 네덜란드 11회, 독일 2회, 중남미 61회 등 총 150여 회에 달했다.

최승희는 일본을 떠난 지 3년 만인 1940년 12월 5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메이지신궁, 야스쿠니 신사 등을 참배하고 조선, 만주, 중국 등에서 수백 차례 황군 위문 공연을 펼쳤다. 국방헌금도 냈다. 1945년 8월 최승희 부부가 중국에 있을 때 일본이 패망했다. 안막은 북한으로 들어갔고 최승희는 국민당군에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은 뒤 1946년 5월 인천으로 귀국했다.

서울에 무용연구소를 열고 활동을 준비하고 있던 7월 안막이 나타나 최승희를 데리고 월북했다. 김일성은 저택을 선물하는 등 최승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 덕에 1946년 9월 평양에 설립한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조선 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을 창작하는 데 매진했다. 최승희는 1946년 11월 북한 최고인민위원으로 뽑혔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연석회의가 열렸을 때는 김일성과 김구 앞에서 경축 공연을 열어 갈채를 받았다. 1950년 3월에는 무용가동맹 중앙위원장으로 뽑히고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국립음악학원 초대 학장, 문화선전성 부장 등 승승장구하던 안막이 1958년 숙청되자 위치가 불안해졌다. 결국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최승희의 이름이 빠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고 최승희 역시 1967년 숙청당해 1969년 8월 8일 눈을 감았다. 한평생 310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고 국내외에서 2,500여 차례를 공연한 한국 현대무용의 태두이자 전통 무용을 일신한 개혁가로서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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