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원산 총파업

일제하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27년 전국적으로 94건(1만 523명)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1920년대 10년 중 참가자는 최대였고 발생 건수는 3번째로 많았다. 그중 가장 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난 곳은 함경남도로 21건이 일어나고 2,560명이 참가했다. 함남에서도 특히 원산은 1921년 원산노동회가 결성되었을 만큼 일찍부터 노동자의 의식이 높은 곳이었다.

원산노동회는 1925년 11월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로 확대 발전한 후 원산 지역 노동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원산노련은 모든 직종을 포괄하며 명실상부한 직업별 노조의 지역연합체로 발전했지만 주력은 단결력을 자랑하는 부두 노동자였다. 투쟁력도 갖춰 여러 차례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파업기금을 적립하고, 소비조합과 자체 노동병원을 운영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춰나갔다. 1927년 6월의 원산부두 노동자 총파업 때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협약권을 손에 넣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처럼 투쟁의 열기가 뜨거운 원산에서 마침내 용암이 분출한 것은 1928년이었다. 9월 7일 원산시 교외의 덕원군 문평리에 소재한 영국인 소유의 문평라이징선 석유회사 공장에서 일본인 현장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 일본인은 평소에도 툭하면 조선인 노동자들을 구타해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던 자였다.

이튿날인 9월 8일 100여 명의 노동자가 현장감독 해고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상부 기관인 원산노련은 파업 노동자들을 문평제유 노조로 조직하고 산하단체로 끌어들였다. 원산노련의 개입으로 파업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단체계약과 관련된 사항은 3개월 뒤로 논의를 미뤘다.

노조는 회사 측의 약속을 믿고 9월 28일 파업을 일단락한 뒤 3개월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 기한이 지났는데도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원산노련이 12월 28일 최고장을 보냈다. 회사 측은 그제서야 본색을 드러냈다. 즉 노동단체를 승인하지 않고 노동조건은 회사 취업규칙에 의한 직공대우조례에 따라 노동자와 직접 해결하겠다며 노조를 기만한 것이다.

 

함남 원산은 일찍부터 노동자 의식이 높은 곳

문평제유 노조는 1929년 1월 14일 파업을 단행했다. 작업 시간 8시간, 취업규칙을 정하되 조합과 협정, 목욕탕 신설 및 직공 무료 이용, 파업 기간 일급 전액 지급, 지배인 사직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원산노련이 산하 조직의 총파업을 결정하고 우차부조합, 인쇄직공조합, 양복직조합 등 다른 노조까지 파업에 가담하면서 원산노련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곧 부두 하역과 화물 운송 등이 올스톱되어 원산 부두에는 석유제품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총파업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선봉대 역할은 원산 지역 일본인 자본가 모임인 원산상공회의소가 맡았다. 원산상공회의소는 1929년 1월 21일 원산노련 소속 부두 노동자 450명을 해고하고 원산노련에 소속된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뒤 전국 각지에서 대체 노동력을 모집했다.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도 동원했다. 하지만 파업 규찰대의 방해에 가로막혀 대체 노동력을 모집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원산상공회의소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 노동단체를 조직했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 중화학 군수공업을 이식하고 있던 일제로서도 대륙 침략을 위한 안정적 병참기지를 확보하려면 막강한 원산노련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1월 24일 인근의 19사단 일부 병력과 재향군인이 완전무장한 채 시가를 행진토록 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원산노련은 식량과 기금을 아끼기 위해 하루 두 끼만 식사를 하면서 ‘한 잔의 술, 한 개비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단호한 구호를 내걸었다. 노동자들은 매일 5전씩 저축했다. 전국에서는 지지 격문이 쏟아지고 연대 기금이 전해졌다. 원산과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의 일본인 노동자들은 물론 중국, 프랑스, 러시아 노동자들까지 지지를 보냈다. 재일·재만동포들로부터도 위문과 격려와 동정금이 답지했다. 조선변호사협회는 2월 4일 이인 변호사를 원산에 파견해 진상 조사와 격려를 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들은 특파원을 보내 사건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일제와 자본가들에게 큰 타격 가해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2월 8일 김경식 원산노련 위원장을 포함해 간부 20여 명을 체포했다. 그러자 이탈자가 점차 늘어났다. 원산노련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상 조사차 원산으로 온 김태영 변호사를 위원장 대리로 추대하고 간부들을 새롭게 보충했다. 이런 가운데 2월 중순부터 파업단의 식량이 떨어지고 엄동설한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곤란해졌다. 쟁의기금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이런 틈을 타 일제는 2월 하순부터 3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원산노련 노조원들의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식량과 가옥 상태 등을 조사했다.

새 지도부는 불리해진 국면 전환을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 김태영 위원장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기치로 내건 기존 원산노련 강령을 폐기하고 ‘생활 향상을 위한 노동자의 수양을 본위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결국 흔들리던 파업 투쟁의 대열은 더욱 흔들리고 내부 분열은 더욱 확대되어 파업 투쟁력이 약화되었다. 하나둘씩 작업장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일부 노동자는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자 어용 노동단체인 함남노동회를 4월 1일과 3일 공격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일본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40여 명을 잡아갔다. 결국 투쟁 의욕을 상실한 원산노련이 4월 6일 단체협약권 포기와 조합원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작업장 복귀를 결정하면서 78일간 지속된 대파업은 끝이 났다.

원산 총파업은 이렇듯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한 개 도시를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뜨려 일제와 자본가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고 일제하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을 이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적지 않다. 또한 3·1 운동, 광주학생운동, 6·10 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원산총파업의 파업 열기는 이후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1929년 4월 대전의 제사공장 450여 명 파업 등 투쟁은 계속 확대되었고 5월에는 부산, 인천, 성진,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의 축소 조작된 통계 수치에 따르더라도 1929년 1년 동안 102건 이상의 파업을 벌여 8,293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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