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두뇌” vs. “피에 굶주린 로자”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두뇌”, “강철 같은 여성 혁명 투사”, “피에 굶주린 로자” 등등….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이렇듯 강렬하고 섬뜩하다. 로자는 제정 러시아의 폭정 아래서 신음하는 폴란드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부유했으나 어릴 적 앓은 골반관절염으로 다리를 절고 키가 작았다. 로자는 고교 졸업 후 폴란드사회당이 창당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대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1890년 무렵 대학에서 알게 된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혁명가 레오 요기헤스는 로자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투쟁의 동지였다. 두 사람은 혁명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웠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당신”, “당신을 포옹하고 수없이 입맞춤을 합니다”, “나는 아기를 가지면 안 되나요?” 등 도무지 혁명 투사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표현이 로자가 레오에게 보낸 편지에 가득했다.
사랑 감정은 16년 동안 이어졌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편하게 나눌 시공간적 여유가 없었다. 너무 자주 떨어져 있고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로자는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선호했고 괴테, 실러, 롤랑, 모차르트, 베토벤, 렘브란트의 예술을 즐겼다.
로자는 1897년 취리히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98년 독일 베를린으로 잠입해 본격적인 혁명 활동을 펼쳤다. 로자는 추방의 위험 없이 독일에서 활동할 목적으로 독일 남자와 위장 결혼을 했다. 로자가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을 무렵 베를린에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 간에 격렬한 이론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을 사회주의화하는 수단으로 의회정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노동 대중의 폭력혁명을 택할 것인지 하는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이었다. 논쟁에 불을 지핀 인물은 점진적이거나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대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다.
로자도 논쟁에 뛰어들었다. 로자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부르주아 체제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 집권에 의해서만 타도되고 그래야만 프롤레타리아의 새 세계가 열린다고 강조했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공박하며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자는 논쟁을 통해 폭력혁명론자로 부각되었고 이 때문에 정부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로자는 레닌과도 1904년 ‘당 조직 논쟁’을 벌여 또다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직업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로자는 몇몇 지도자들이 당의 권력을 독점하면 안 된다고 맞섰다.
‘자본 축적론’, 마르크스의 ‘자본’에 필적하는 명저
1904년 여름 독일사회민주당을 위한 선거운동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2개월간 투옥된 것은 이후 로자가 감내해야 할 투옥과 석방의 전주곡이었다. 로자와 레오는 1905년 1월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각각 위조 여권을 만들어 러시아로 잠입하려다가 폴란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 후 로자는 ‘농민에 의존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론’을 전개했다. 사회주의자들이 농민과 연합하고 그들의 혁명적 행동에 의존해 절대주의를 타도한 다음 단독으로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자·농민으로 구성된 혁명적 대중을 군대 조직으로 편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주장 역시 레닌의 이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레닌은 농민의 중요성을 배제하고 혁명적 대중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직업적이고 음모적 혁명가들이 당의 중앙을 형성하고 국가의 핵심인 무력 기관들을 장악함으로써 혁명적 쿠데타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로자는 1905년 12월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돌아가 총파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폴란드사회당의 지도자들은 러시아혁명이 달성되면 폴란드가 러시아에서 독립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총파업을 저지하는 등 사실상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으로 선회했다.
로자는 총파업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유일한 전투 수단임을 외치며 투쟁을 선도하다가 1906년 3월 ‘반국가음모죄’로 체포·투옥되었으나 매수 공작을 벌여 석방되었다. 로자와 레오는 1907년 베를린에서 다시 만났으나 사랑의 감정은 이미 식은 뒤였다. 그래도 둘은 혁명 동지로 서로 연락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로자는 1907년부터 7년 동안 베를린의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연관을 밝혀낸 ‘자본 축적론’(1913)을 틈틈이 썼다. ‘자본 축적론’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화하는 과정과 제국주의가 일으키는 전쟁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 마르크스의 ‘자본’에 필적하는 명저로 꼽히고 있다. 몇몇 전문가들은 “천재의 주도면밀한 저술”이라고 상찬하며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보인 몇 가지 이론적 허점을 보완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급진 좌파들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 결성
로자의 투쟁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날 살해된 카를 리프크네히트(1871~1919)다. 카를은 베를린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활약했다. 1907년 청년인터내셔널 창설을 주도하고 독일의 군국주의 정책을 공격했으며 사회주의를 강력히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18개월 동안 투옥되었는데도 옥중에서 지방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카를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해야만 평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그에게 수정주의로 기울고 있는 사회민주당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다. 로자와는 수정주의와 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 구성을 반대하는 등 모든 면에서 일치했다. 1914년 8월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사회민주당은 독일 국민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편승하기 위해 정부의 전쟁 예산을 통과시켜 세계 사회주의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로자와 카를은 당의 결정에 맞서다 1915년 2월 함께 투옥되었다.
1년 후 석방된 로자와 카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1월 사회민주당 내 급진 좌파들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의 검투 노예로 자신의 동료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십자가 형틀에서 목숨을 잃은 영웅적 혁명가였다. 두 사람은 1916년 5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메이데이 봉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봉기는 진압되었고 둘은 체포되어 남은 전쟁 기간 감옥에 갇혀 있거나 보호 조치를 받았다. 이 때문에 1917년 2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현장을 지키지는 못했다.
로자는 1918년 레닌과 또다시 논쟁을 전개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 성공 후 레닌이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자신의 추종 세력들을 중심으로 관료적 레닌주의를 구축하자 이를 비판한 것이다.
로자는 “혁명운동은 자의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또한 당 간부들의 결정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기 하에서 자발적으로 폭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레닌은 이런 로자를 가리켜 “대중 추수(追隨)주의자”라며 맞받아쳤다. 레닌을 추종하는 다른 동지들도 로자의 ‘자발성 주장’이 “계급투쟁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 내지 과소평가하고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의식적이고 조직된 행동의 중요성을 망각했다”고 비판했다.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오류의 총합’으로 비판받아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 독일의 제2제국이 무너졌을 때 독일의 과도 연립정부를 이끈 것은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에 관심을 쏟아 1905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고 1913년 당수로 선출되었다. 온건 노선을 이끌었던 그의 지도력 아래 임시 공화정부는 제헌국민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 일정을 발표했다. 그러자 로자와 카를은 즉각 반기를 들고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을 창당했다.
다만 로자는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을 독일에 그대로 재현할 생각은 없었다. 로자는 10월 혁명 후 러시아에 나타난 정치체제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재 체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체제라고 비판했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 권력과 국가와 역사 발전에 당당하면서도 창조적 주체가 되는 이상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체제였다.
로자와 카를이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자 독일 정부의 우익 세력은 로자와 카를이 등 뒤에서 칼을 찔렀다며 두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런 가운데 로자와 카를은 1919년 1월 5일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는 군부와 의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로자와 카를 역시 1월 15일 밤 체포되었다. 카를은 도주하다 사살된 것처럼 꾸미려는 군부와 경찰의 음모에 의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죽었으며, 로자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실신한 상태에서 차로 끌려가 권총으로 살해된 후 베를린의 란트베르 운하 속으로 내던져졌다. 로자의 시신은 5월 31일 부패된 모습으로 강에서 발견되었다.
격분한 레오 요기헤스는 진상 조사에 나서 살해자들이 살해를 마친 뒤 열었던 술자리의 사진을 입수해 그들의 음모를 폭로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일로 보복을 당해 1919년 3월 10일 경찰에 살해되었다.
로자는 서유럽의 보수 우파에게만 ‘피에 굶주린 붉은 악마’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도 ‘볼셰비즘의 적’이었으며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오류의 총합’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복권되긴 했지만, 독일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는 맥락에 한정되었다.
로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신봉자답게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 독립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연방을 선호한 탓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찍힌 ‘민족 허무주의’라는 주홍 글씨는 죽어서도 쫓아다녔다.
☞베른슈타인과 수정자본주의 논쟁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1872년 독일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1878년 비스마르크 총리가 만든 ‘사회주의자 진압법’에 반대하다가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2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면서 영국형의 점진적 개혁주의 운동이 거둔 성과에 크게 공감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 변화 능력을 인정했다. 망명 생활에서 풀려난 뒤에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비판하고 의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을 통한 평화적 개혁 노선을 제시했다.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민당의 기관지 ‘새 시대’에 “자본주의의 생명은 폭력적이고 극적인 타도에 의해 종결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파국 이론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런데도 논문은 그다지 논란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가 점진적이거나 평화적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도 당원들이 별로 저항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마르크시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1898년 베를린으로 건너온 유대계 폴란드인 로자 룩셈부르크가 거칠게 반발하면서 논쟁은 뜨겁게 달궈졌다. 로자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지속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베른슈타인 역시 1899년 출간된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들과 사회민주당의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자본주의 붕괴론 및 폭력혁명론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즉 자본주의 붕괴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언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폭력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적·점진적 개혁을 통해야만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서유럽 산업국가에서는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고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으며 실질임금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말한 10년마다의 경제 위기도 20년 넘게 나타나지 않았고 1870년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도 없었으며 독일제국 빌헬름 2세의 정책 변화로 노동운동도 합법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베른슈타인의 이런 예측과 주장은 유럽 자본주의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뒤에 나온 것이어서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 한껏 고양되어 있던 사민당 내 강성 당원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내 이론가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은 수세에 몰리고 수정주의자로 분류되었다.
특히 1917년의 러시아혁명 후에는 그의 이론이 무가치한 것으로 호된 비판을 받아 이후 공산권에서는 ‘수정주의자’ 하면 변절과 욕설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독일 사민당과 사회주의 일반이 겪어온 성쇠는 베른슈타인이 역사의 승리자임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