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처단

그 날의 총성은 이토를 향한 안중근의 엄중한 경고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의 하얼빈역 하늘에 6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첫 3발은 일본 초대 내각총리와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옆구리, 배에 명중했고 다른 3발은 이토를 수행하던 3명의 일본인을 쓰러뜨렸다. 이토는 30분 후 죽고 다른 3명은 중경상을 당했다. 그날의 총성은 이토를 향한 안중근(1879~1910)의 엄중한 경고였다. 안중근은 적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힘차게 외친 뒤 현장에서 러시아군에게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려서는 ‘응칠’로 불렸다. 부친 안태훈은 안중근이 5살 때인 1884년 대대로 살던 해주를 떠나 인적이 드문 신천군 청계동의 산속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안중근은 비교적 풍족하게 성장했다.

안중근이 15살 때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동학군은 고을마다 관리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해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동학도를 ‘동도(東徒)’ 또는 ‘동비(東匪)’ 등으로 칭하면서 일부 동학군의 비행을 상세히 기록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도 동학당의 포악한 행동을 참을 수 없어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의 포수를 끌어모았다.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1894년 12월 동학군 1,700여 명이 청계동을 기습하려고 할 때 안태훈은 40여 명의 포수가 야간에 동학군을 기습공격하도록 했다. 안중근은 15세 나이로 정찰대 역할을 맡았다.

안태훈의 민병들은 기습 공격으로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1,000여 포대의 군량을 얻었다. 동학군은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안태훈의 민병은 이후에도 동학군을 상대로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여 번번이 승리했다. 당시 황해도 동학 농민군의 우두머리 중에는 18세 청년 접주 김구도 있었다. 김구는 1894년 팔봉 접주로 해주성 공략 작전에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실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김구가 몽금포에 은거해있을 때 김구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안태훈이 밀사를 보내 김구를 불러들였다. 이후 김구는 1895년 2월부터 3개월 동안 안태훈의 환대를 받으며 청계동 산속에 머물다가 떠났다. 두 사람의 기록에는 없지만 김구와 안중근은 나이가 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같이 어울렸을 공산이 크다.

안태훈은 1896년 10월 억울한 역모에 몰려 서울의 종현성당(명동성당)으로 피신한 것을 계기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청계동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안태훈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안중근도 세례(세례명 도마)를 받았다. 1898년 4월 청계동본당이 설립되고 니콜라스 빌렘(한국 이름 홍석구)이 부임하자 안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전도했다. 틈틈이 국제 정세와 외국 동향을 빌렘 신부에게서 전해 들었다.

안중근은 황해도 진남포에서 1906년 봄부터 1907년 8월 망명할 때까지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중등 수준의 야학교인 삼흥학교를 설립해 교육 구국 사업을 벌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고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서북학회의 전신)에도 가입했다. 구국 운동 자금은 평양에 미곡상과 무연탄 판매회사를 차려 마련했다.

1907년이 되자 헤이그 밀사 사건, 정미조약, 고종의 폐위, 군대 해산 등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의병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격렬했다. 이러한 급격한 상황 변화는 안중근이 계몽운동에만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안중근은 1907년 8월 서울을 떠나 1907년 9월 북간도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곳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의병을 일으키기가 곤란하다고 판단해 러시아령 연추(크라스키노)와 목허우(포시예트)를 거쳐 1907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손 약지 끝마디를 끊고 ‘단지 동맹’ 맺어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력 인사는 이범윤과 최재형이었다. 이범윤이 망명 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 정착 한인을 대표했다. 안중근은 그들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설득하고 엄인섭과 김기룡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또한 연해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 참가자와 군자금을 모았으며 1908년 4월 이범윤과 최재형 등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이 의병 활동을 위해 결성한 ‘동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동의회는 수백 명으로 구성된 연합 의병부대를 산하에 두었는데 김두성이 총독,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안중근과 엄인섭은 각각 우영장과 좌영장을 맡았다. 안중근이 의거 후 공식 직함으로 내세운 ‘의병참모중장’은 이 우영장에서 연유한다.

의병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때 안중근도 참가했다.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19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와 함북 경흥군 노면 삼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진지를 점령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08년 7월에도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해 4명의 일본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안중근은 “만국공법(국제법)에 포로를 죽이는 일이 없다”며 일본군을 풀어주었다.

안중근의 포로 석방은 의병부대 내에 심각한 파장을 불러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인섭의 의병부대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안중근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더구나 풀어준 일본군이 의병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기습 공격을 해 와 피해가 더 컸다. 안중근도 산속을 헤매다가 진공작전을 벌인 지 한 달도 더 지나 귀환했다. 1년 뒤 안중근과 거사를 도모하게 될 우덕순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까지 구형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안중근은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의병부대를 떠났다. 1909년 3월 5일(음력 2월 7일)에는 러시아 연추에서 ‘단지동맹’(혹은 동의단지회)을 결성했다.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약지 끝마디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크게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3번 외쳤다.

안중근이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이토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동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토는 그해 6월 조선통감을 그만두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자며 우덕순에게 거사를 제의했다. 우덕순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던 동지였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10월 21일 아침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780㎞ 떨어진 하얼빈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9시 25분 수분하(쑤이펀허)에 도착한 열차가 1시간 정차하는 동안 열차에서 빠져나와 통역을 담당할 유동하를 만났다. 유동하는 안중근과 평소 친분이 있는 한의사의 아들로 당시 나이 18세였다. 세 사람을 태운 열차는 10월 22일 밤 9시 15분 하얼빈에 도착했고 안중근 일행은 그곳에 머물렀다.

안중근은 현지 신문을 통해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10월 25일 밤 장춘을 출발해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열차의 출발지인 장춘까지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비가 부족한 데다 채가구에서 열차가 교차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채가구에서 거사를 벌이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유동하 대신 새로 통역을 맡아줄 조도선과 함께 25일 12시쯤 채가구에 도착했다. 역무원을 통해 이토의 특별열차가 26일 아침 6시에 채가구에 도착하고 9시쯤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아침 6시쯤이면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이토는 채가구 역에 내리지 않을 것이고 설사 내린다 해도 이토의 얼굴을 몰라 어둠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기가 힘들다고 판단해 안중근 자신은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두 사람은 채가구에 남아 기회를 엿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안중근은 헤어지면서 덤덤탄이라고 불리는 특수 탄환을 우덕순에게 건넸다. 탄환의 끝 부분에 십자형을 새겼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적중하기만 하면 납 알갱이가 퍼져 치명적인 상해를 주는 것이어서 당시는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탄환이었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힘차게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안중근은 10월 25일 하얼빈으로 돌아가 지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오전 7시쯤 권총을 지닌 채 하얼빈역으로 가 역내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열차를 기다렸다. 특별열차는 9시쯤 도착했다. 이윽고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라가 이토와 15분간 환담을 나눈 뒤 함께 열차에서 내려왔다. 이토가 플랫폼에서 러시아 악대의 군악 소리에 맞춰 군인과 외교사절단을 사열하는 동안 안중근은 서서히 접근했다. 그때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을 받고 있는, 얼굴은 누렇고 수염은 흰 자그마한 늙은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안중근은 이토로 짐작되는 그에게 다가가 브라우닝 7연발 권총으로 3발을 쐈다. 총탄은 이토의 가슴과 옆구리, 배에 명중했다. 그리고 이토를 뒤따르던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만철 이사 등 3명의 일본인을 향해 또다시 3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곧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힘차게 세 번 외친 뒤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0월 26일 오전 9시 반쯤이었다.

이토는 피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숨졌다. 오른쪽 폐를 관통한 총알이 결정적 사인이었다. 조선인이 자신을 쏘았다는 말을 병원에서 전해 듣고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는 일본 관리의 전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국내 학계의 정설이다. 이토의 죽음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기고 위인의 면모를 보이려는 의도에 맞춘 발언이라는 것이다.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전날 밤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어 특별열차가 2분 정도 정차했을 때도 머물던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안중근의 거사 후인 오전 11시 55분쯤 방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하얼빈에 거주하던 한인 다수도 체포되었다. 김구도 청계동 시절의 인연으로 황해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한 달 넘게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청국으로부터 조차 형식으로 빼앗은 땅이었다. 따라서 안중근의 공식적인 재판권은 러시아에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국은 한국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므로 일본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중근의 신병을 요청하자 러시아는 1차 조사만 마친 후 그날 밤 늦게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8명과 조서 서류 일체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검찰관에게 이토의 죄목 15개항 진술

안중근은 10월 30일 일본인 검찰관 앞에서 ▲조선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조선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 이토의 죄목 15개항을 진술했다. 그리고 11월 3일 중국 여순감옥으로 옮겨졌다. 안중근은 12월 13일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한문으로 쓰기 시작해 1910년 3월 15일 탈고했다. 그러나 원고는 안중근 순국 후에도 유족에게 전달되지 않고 일제의 한국 통치 자료로 이용되었다. 현재 ‘안응칠 역사’와 역시 감옥에서 안중근이 쓴 ‘동양평화론’ 원본은 아직도 소재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10년 2월 7일 시작된 재판에서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는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조선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을 포살한 것이므로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전쟁 포로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사는 6차 공판인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우덕순에게는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2심에서도 어차피 사형이 선고될 게 뻔한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는 게 2심 재판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틈틈이 법원과 여순감옥의 관리들에게 부탁받은 글씨도 써야 했다. 순국 때까지 감옥에서 쓴 글씨는 현재 70여 점이 남아 있다. ‘동양평화론’은 완성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안정근과 안공근 두 아우에게 “유해는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조국이 독립하면 그때 가져가 달라”고 당부하고 6통의 편지를 전달했다. 어머니, 부인, 사촌동생, 뮈텔 천주교 조선대목구 주교, 빌렘 신부, 숙부에게 보낸 편지들은 사실상의 유서였다. 고국에 있는 2,000만 동포에게도 “학문을 면려하고 실업을 진흥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이 예정된 날에도 한 폭의 글을 썼다. 안중근을 경외한 일본 간수에게 써준 유묵이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유묵 옆에는 무명지(약지)를 절단한 왼손 손바닥의 수인을 찍었다. 이 휘호는 1979년 소지자인 간수의 질녀가 한국에 반환해 현재는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중근은 3월 26일 오전 10시 모친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교수대 옆 대기실로 갔다가 눈을 가린 채 교수대에 올라가 10시 4분쯤 조용히 형의 집행을 받았다. 감옥의는 10시 15분 절명했다고 보고했다. 밖에는 추적추적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감옥 측은 침관에 사체를 넣고 흰 천을 덮어 교회당으로 운구했다. 뒤이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세 사람이 예배를 하게 하고 오후 1시 여순감옥 묘지에 파묻었다. 이 매장지 위치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 동생 안정근·안공근도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 해

안중근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중근은 부인 김아려와의 사이에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거사에 앞서 1909년 음력 7,8월경 지인에게 가족을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거사 후 가족의 안위가 염려되어 러시아로 오게 한 것이다. 어머니, 부인, 자식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으나 안중근은 가족을 상봉하지 못한 채 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안중근 순국 후 가족은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살다가 1911년 4월 중국 흑룡강성 목릉현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해 여름 장남 분도가 12살 나이에 죽었다. 분도가 죽기 전 어떤 낚시꾼이 주는 과자를 먹었다는 말을 남긴 채 쓰러져 독살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가족은 1914년 러시아령 우수리스크로 이주했다가 1919년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딸 현생은 19세, 아들 준생은 13세였다. 1932년 이후에는 독립운동 진영과 단절된 채 생활했다.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날 때 부인과 안준생은 상해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은 25세에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과 결혼, 상해를 떠나고 없었다.

조용히 지내던 아들과 딸이 국내 언론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것은 1939년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박문사의 화해극’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은 ‘재상해 실업가유지 만선시찰단’에 포함된 안준생이 10월 15일 서울의 박문사를 방문해 이토의 명복을 빌면서 불거졌다. 안준생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행위가 “오해로 인한 폭거”였음을 인정했다고도 발표했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현창하기 위해 1932년 장충단 동쪽에 세운 절로 이토의 이름인 박문(히로부미)에서 땄다.

10월 17일에는 이토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와 함께 박문사를 방문, 부친의 죄를 사죄하고 이토 영전에서 화해하는 더욱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1941년 3월 26일에는 딸 안현생도 박문사에 들러 참배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했다.

이 때문에 두 자식은 1945년 광복 후에도 한동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구는 광복을 맞아 조국에 돌아오기 직전,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 관헌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부인은 1946년 상해에서 세상을 떠나 중국에 묻혔다. 안준생은 폐결핵에 걸려 1950년 6월 귀국했다가 이듬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서 사망했다. 안준생의 부인과 아들은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안현생의 남편 황일청은 일본 패망 후 상해에서 광복군과 학병 간의 알력을 중재하다가 광복군이 쏜 총을 맞고 1945년 12월 사망했다. 안현생은 1946년 11월 귀국해 잠시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에서 불문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1959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안중근의 두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정근은 러시아군 장교로 1차대전에 참전하고 1918년 8월 상해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에서 조소앙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에 3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김구가 낙양군관학교에 설치한 한인특별반 생도들을 국내외에서 모집할 때도 크게 기여했다. 1926년부터는 조선업으로 위장하고 공작선 건조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홍콩으로 피신했다. 1939년 지병으로 고통을 받아 중국에서 은거하다가 1949년 3월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안정근의 딸 안미생이 김구의 장남인 김인과 결혼함으로써 김구와는 사돈이 되었다.

안공근은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과정 때부터 15년 이상 김구의 최측근 동지로 동고동락했다. 1931년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만들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에 위치한 안공근의 집에 설치되었고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뤄졌다. 1931년 12월 이봉창 의사의 선서식도 안공근의 집에서 거행되고 윤봉길 의사가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도 안공근의 차남 안낙생의 집에서 촬영한 것이다. 특히 윤봉길 의거 후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했을 때는 가흥과 상해를 오가며 한인애국단을 총괄했다.

1934년 12월에는 한인특별반의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관리와 운영 책임을 맡았으나 1939년 5월 30일 중경에서 실종되었다. 독립운동단체 내부의 분파 투쟁으로 희생되었다는 설과 일제 밀정이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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