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러일전쟁 발발과 제물포·쓰시마 해전

러일전쟁,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 바꿔놓아

1895년 4월 17일 일본이 청국과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 승리의 산물이었다. 조약에 따라 청국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를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조약을 조인한 지 6일 만인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개국이 ‘3국간섭’에 나서면서 일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일본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3개국과 일전을 겨룰 만한 군사력이 아직은 충분치 못해 5월 5일 요동반도 포기를 3국에 통보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00년 러시아가 건설 중이던 하얼빈~대련 간 동청철도를 청국의 의화단이 공격하고 흑룡강을 항행하는 러시아 기선을 청군이 포격하자 러시아군이 이를 빌미로 시베리아에서 만주로 밀고 내려왔다. 의화단 진압 후 영국·미국·프랑스·일본 등 열강의 군대는 모두 철군했으나 러시아는 만주에 질서가 회복될 때 철군하겠다며 계속 만주에 주둔했다.

영국은 러시아군의 계속 주둔으로 중국에서의 자국 이권이 침해되는 것을 우려해 1900년 10월 ‘중국의 소요를 이용해 영토상의 이익을 획득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정을 독일과 체결해 러시아를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1902년 1월 30일에는 ‘청국과 조선에서 일본과 영국 어느 한쪽의 이익이 타국에 침범당할 경우 양국이 이를 지키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제1차 영일동맹을 일본과 체결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런데도 러시아군은 일부만 철군했을 뿐 나머지는 계속 주둔했다. 게다가 압록강 상류의 삼림 벌채권 보호를 구실로 1903년 5월 신의주 외항인 용암포를 점거해 일본과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결국은 영국·미국·일본의 반대에 밀려 1903년 8월 용암포를 조차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호시탐탐 조선 전역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자국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어떻게든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보장받아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계산은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에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양국은 조선과 만주 문제를 둘러싼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1903년 후반기부더 수차례 회담을 벌였으나 동상이몽만 확인할 뿐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04년 2월 4일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를 열어 전쟁을 결의하고 2월 6일 러시아에 국교단절을 통고했다. 2월 6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중국 여순과 제물포에 정박 중인 러시아의 군함을 공격하라”고 휘하의 연합함대에 명령을 내리고 전함 6척, 순양함 14척, 어뢰정 30여 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가 사세보항을 출항하면서 마침내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을 러일전쟁의 막이 올랐다.

전쟁에 앞서 대한제국은 1월 21일, ‘전시중립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그 내용은 러일 간의 평화가 결렬될 경우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각국에 동시 타전되었다.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2월 8일 육군을 제물포항에 상륙시키고 곧바로 서울에 진주케 한 뒤 1월 21일 전시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을 강압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병참기지 사용과 각종 인적·물적 자원의 징발이 가능해졌다. 자체적인 군사력 없이는 영구중립국화는 물론이고 전시중립조차 지켜낼 수 없는 것이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이었다.

제물포항은 러시아,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전함들이 정박 중이던 열강의 각축장이자 군함의 전시장이었다. 러시아 군함은 순양함 바랴크함과 소형 포함 카레예츠함, 그리고 여객선 순가리호가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의 연합함대 중 일부는 2월 7일 제물포항 인근에 정박했다가 2월 8일 오후 4시 35분 경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는 카레예츠함을 향해 팔미도 근해에서 수뢰를 발사했다. 빗나가거나 중도에서 가라앉아 카레예츠함은 파손을 면하고 제물포항으로 회항했다. 일본 함대는 열강의 군함을 의식해 제물포항에서는 러시아 함선을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3,000여 명의 병력을 2월 8일 저녁부터 제물포항에 내려놓았다.

러일전쟁은 이렇게 2월 8일 오후 제물포 앞 팔미도에서 일본 측의 공격으로 사실상 시작되었는데도 러일전쟁의 공식 개전일이 2월 9일로 알려진 것은 일본군이 한반도의 통신망을 장악한 상태에서 2월 8일의 카레예츠함 공격이 러시아 본국에 보고되지 못한 반면 2월 9일의 여순항 공격은 바로 러시아 본국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여순과 제물포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을 공격하라”

러일전쟁은 2월 9일 새벽 일본의 연합함대가 여순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개전했다. 일본 함대는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모든 외국 군함에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며 항구를 떠날 것을 통보했다. 러시아의 바랴크함과 카레예츠함은 2월 9일 오전 11시경 제물포 정박지를 떠나 서해로 나아갔다. 그러자 팔미도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함대에 백기 투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응답이 없자 오전 11시 45분 바랴크함과 카레예츠함을 향해 발포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14 대 2의 싸움이었으나 바랴크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본이 자랑하는 영국제 철갑 순양함 아사마함의 사령탑을 강타해 함장을 즉사시키고 다카치함을 크게 파손시켰다. 다카치함은 긴급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침몰했다. 바랴크함도 크게 파손되어 낮 12시 45분 제물포항으로 후퇴했다. 카레예츠함은 큰 피해 없이 제물포항으로 돌아왔다.

러시아 함대는 바랴크함을 전리품으로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침을 결정했다. 바랴크함은 수병 유해와 함께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카레예츠함도 자폭해 가라앉히고 우편선 순가리호는 불을 질러 침수시켰다.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바랴크함은 전사자 34명, 부상자 196명 등 230명의 피해를 냈다. 일본 함대도 피해가 커 사망자가 30명에 이르고 200여 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한편 여순으로 향한 일본의 연합함대는 2월 9일 0시 20분 선전포고도 없이 여순항 외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태평양함대(극동함대) 함정들을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이 공격으로 3척이 피격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2월 9일과 10일 상대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러일전쟁이 마침내 발발했다.

개전 초기 일본의 주력 함대는 태평양함대를 포격전으로 공격했지만 러시아 해안 포대의 반격에 부닥쳐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여순항 외항에 기뢰를 부설해 여순항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봉쇄를 뚫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4월 13일에는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함이 기뢰에 부딪쳐 함정은 침몰하고 기함에 승선하고 있던 스테판 마카로프 함대 사령관은 630여 명의 수병과 함께 전사했다. 일본 역시 러시아가 설치한 기뢰에 2척의 주력 전함이 폭침하는 큰 피해를 보았다. 5월 15일에도 대형 전함 하쓰세호가 기뢰에 부딪혀 493명의 승조원과 함께 폭침했다. 태평양함대는 6월 23일에도 봉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또다시 일본 함대에 가로막혀 회항하고 말았다.

태평양함대가 또다시 대규모 탈출을 감행한 것은 8월 10일이었다. 이른바 황해해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함 체사레비치함이 포탄을 맞아 파손되고 함대 사령관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이 전사했다. 결국 포격을 면한 전함 5척, 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은 다시 여순항으로 귀환하고, 파손된 체사레비치함과 3척의 구축함은 독일령 조차지인 교주만으로 피신했다.

한반도 서해에서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동해에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동해상으로 남하해 일본의 해군력을 서해와 동해로 분산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함대 역시 일본 함대와의 교전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해에 이어 동남해 해역까지 전 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평양 전투(2월)와 정주 전투(3월)를 승리로 장식하며 북진한 뒤 압록강 전투(5월)에서도 러시아군을 격퇴함으로써 만주 전선의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5월에 요동반도의 대련에 상륙하고 여순 외곽에 진출했다. 러시아군은 이에 맞서 대련과 여순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러시아의 패전은 차르 체제 종말의 서막

일본군은 8월 19일 여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03m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첫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러시아의 철벽 방어에 가로막혀 엄청난 사상자만 냈을 뿐 실패했다. 8월 25일에는 세계전사에 ‘20세기의 대전투 중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 요양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요양을 방어하는 러시아군은 23만 명, 일본군은 14만 명이었으나 러시아군이 9월 초 봉천(현 심양)으로 철수하면서 요양은 일본군 차지가 되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자 1만 1,100여 명을 포함해 총 5만 9,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패전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승전을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요양 전투에서 7,400여 명이 전사했다. 때문에 “일본은 요양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땅을 얻었을 뿐”이라고 보도한 외신도 있었다.

일본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낸 끝에 203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것은 12월 5일 밤이었다. 뒤이어 203고지에서 항구 안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을 향해 포탄을 날려 함정 사냥에 나섰다. 항내에 숨어 있던 함정들이 파괴되면서 러시아 여순함대는 궤멸되었다. 일본군이 12월 31일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하자 러시아군 사령관은 1905년 1월 2일 저녁 7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여순 함락 20일 후인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훗날 레닌은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종말의 서막이었다”고 토로했다. 일본은 여순 전투 후 1905년 2월 23일 봉천에서 또다시 대회전을 시작해 3월 10일 봉천을 점령했으나 이번에도 피해가 막심해 승리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이제 일본이 상대해야 할 마지막 상대는 여순의 태평양함대를 돕기 위해 멀리 지구를 3분의 2바퀴나 돌아온 세계 최강 전력의 발트함대였다. 발트함대가 발트해 리바우(현재 라트비아공화국 리예파야)항을 출항한 것은 1904년 10월 15일이었다. 그해 4월 태평양 제2함대로 개편된 발트함대는 전함 7척, 순양함 9척 등 총 40여 척으로 편성되었고 승무원은 1만 2,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사령관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해군 소장(원정 항해 중 중장으로 진급)이었다.

문제는 발트함대가 일부 함정을 제외하고는 잡동사니 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속력은 느리고 무장은 빈약했다. 장교와 사병들도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데다 훈련도 받지 않았다. 툭하면 엔진 고장을 일으키는 대함대가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돌고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2만 8,000여㎞를 수개월 동안 항해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낡은 함선과 오합지졸 병사의 훈련 부족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세계 최강의 해양대국인 영국이 1902년의 영일동맹 후 일본 편에 섰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이런 상황에서 출항한 지 1주일째 되던 날 북해를 통과할 때 영국의 원양어선을 적함으로 오인해 발포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결국 발트함대는 곳곳에서 영국의 방해를 받았다. 발트함대는 극동으로 항해하는 도중 곳곳 항구에 기항해 연료(석탄)를 공급받고 선체를 수리해야 했으나 영국의 압력으로 기항이 순조롭지 않았다.

대함대의 항진 소식이 세계 언론에 속속 보도되는 가운데 발트함대는 두 패로 갈려 한 패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돌고 다른 한 패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뒤 1905년 1월 9일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에서 합류했다. 그런데 여순항이 함락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본국에서는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제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함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수개월간 본국의 칙령을 기다리다가 여순항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항했다. 베트남 해역에서도 또다시 1개월간 기다렸다. 태평양함대는 5월 말 중국 상해 등지에서 마지막 석탄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항했다.

 

일본, 전쟁 승리로 세계 열강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켜

발트함대는 세 갈래 북상 항로 중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대한해협을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쓰시마(대마도)를 경계선으로 해 대한해협의 서수로가 아닌 동수로(쓰시마 해협)를 통과하기로 했다. 육전에서는 이미 일본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발트함대와 연합함대의 해전은 러일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최후의 결전이었다. 발트함대가 대한해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장장 220일간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달하는 2만 8,800㎞나 되는 항해로 병사들의 몸은 지쳐 있었다. 함선들도 제대로 수리를 받지 못해 속력을 내지 못했다.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발트함대를 발견했다는 제1보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승선하고 있는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에 날아들었다.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를 가르는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일본 함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오전 5시 5분, 도고가 전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을 때 발트함대는 제1, 제2, 제3 전함대로 나뉘어 종열 편대로 북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연합함대는 발트함대와 10㎞ 거리를 두고 전진하다가 선두에서 항진하던 미카사함이 서서히 대회전을 시작했다. 함수를 왼쪽으로 급히 꺾어 종대 대형으로 항해하는 러시아 함대에 옆구리를 드러내며 진로를 가로막아 세우는 T자 진형을 취한 것이다. 발트함대의 진로 앞에 일렬횡대형으로 전함을 배치하는 이 대담한 전술은 훗날 ‘도고 턴’이란 작전명으로 세계 전사에 기록되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의 총사령관이 탄 기함을 먼저 포격해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려는 전술을 썼다. 오후 2시쯤 양측의 기함인 러시아의 수보로프함과 일본의 기함인 미카사함이 상대 기함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으면서 쓰시마 해전이 시작되었다. 승패는 전투 개시 30분 만에 사실상 갈렸다. 발트함대의 주력함은 거의 대부분 불길에 휩싸였다.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도 포탄 파편을 맞아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어 발트함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기함인 수보로프함은 불길에 휩싸이고 상부 구조물이 대부분 파괴된 채 전열에서 이탈했다.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은 오후 5시 30분 다른 구축함으로 옮겨 태워졌고 지휘권은 네브가토프가 맡았다. 발트함대는 전함 6척, 순양함 4척 등 16척이 격침되고, 5척은 자침했다. 6척은 일본에 나포되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도고 제독이 울릉도 앞바다에 집결하라고 전 함대에 명령했다. 도주하는 발트함대의 나머지 전함의 진로를 봉쇄하는 작전이었다. 도주하는 발트함대 대부분은 5월 28일 울릉도 근해에서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이 누워 있는 함정은 울릉도 근해에서 항복하고 지휘권을 인수한 네바가토프가 5월 29일 독도 해상에서 일본에 항복함으로써 러일전쟁은 종결되었다. 50척 중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군함은 겨우 3척이었고 5,045명이 전사했으며 6,1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부 군함은 필리핀의 마닐라와 중국 상해로 도주했다. 반면 연합함대는 구축함 3척 침몰, 115명이 전사하고 660여 명이 부상했다.

일본이 쓰시마 해전을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승리”, “세계사의 물줄기를 돌린 쾌거”라고 자찬했지만 전쟁 전 기간의 전사자는 러시아보다 훨씬 많았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5만 5,600명(러시아 2만 5300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1만 1,400명(6,100명), 병사 2만 7,100명(1만 1,100명), 포로 1,800명(7만 9,000명)이었다.

그래도 서양의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 동양의 소국이 도전장을 낸 이 전쟁 승리로 일본은 세계 열강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또한 머지않아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올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는 1945년까지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일본의 승전은 유럽 열강의 침략에 허덕이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반면 러시아는 차르 체제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혁명을 불러와 공산주의라는 악성종양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존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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