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국내 첫 하와이 이민선 제물포항 출발

하와이 이민의 산파는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

하와이는 미주 지역 한인 이민의 시발점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한인들을 처음 하와이로 유인한 것은 사탕수수였다. 19세기 중반 미 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골드러시에 따라 사탕수수 수요가 폭증하고, 이에 따라 하와이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개발되면서 일손이 부족해진 게 한인을 끌어들인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일꾼 확보를 위해 먼저 눈을 돌린 곳은 아시아의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인 노동자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미국 본토의 도시로 이주해 자기들만의 타운을 형성하고 미국인의 상권을 위협했다. 그러자 중국인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중국인을 반대하는 소요가 일어났고 급기야 ‘중국인 이민금지법’(1882)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897년 하와이가 미국에 합병되고, ‘중국인 입국금지법’이 하와이에도 적용됨에 따라 중국인의 이주는 한동안 맥이 끊겼다.

일본인은 1885년부터 대거 하와이로 이주해 1902년 무렵에는 3만여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 6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일본인 노동자는 당시 하와이 전체 노동인구의 70%나 되었다. 문제는 일본인들이 수시로 파업을 일으켜 농장주들이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이다.

농장주들이 일본인 노동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1902년 눈을 돌린 곳이 조선이었다. 마침 조선 내 사정도 이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극심한 가뭄과 홍수, 그리고 기근 때문에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쌀·곡물의 대량 반출로 식량 사정이 날로 악화되었다. 이런 양측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것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이었다. 알렌은 1902년 3월 미국에서 조선으로 귀임하던 중 하와이 농장주들로부터 조선인 이민을 요청받았고 귀국 후 고종에게 이 사실을 건의했다.

고종은 1902년 11월 15일 하와이 이민 모집·송출과 관련된 사업의 전권을 미국인 사업가 데이비드 데슐러에게 일임하고 이튿날 조정의 궁내부 안에 이민 업무를 전담할 ‘유민원’을 신설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민영환을 초대 총재로 하는 유민원이 설치되었다.

데슐러는 이민 모집과 송출 업무를 담당할 ‘동서개발회사’와 이민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줄 ‘데슐러은행’을 설립한 뒤 제물포항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항구도시와 내륙 주요 도시의 기차역, 시장 등에 이민자 모집 공고를 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하와이로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데슐러는 ‘웨슬리메모리얼교회(현 인천내리교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조지 존스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존스는 교인들에게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비유하며 적극적으로 이민을 권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인 신청자는 121명이었다.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월미도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겐카이마루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해 102명만 1903년 1월 2일 하와이로 가는 미국 상선 ‘갤릭호’로 옮겨 탔다. 존스 목사의 설득이 크게 작용해 인천 출신은 86명(84%), 인천내리교회 신도들은 50여 명이나 되었다.

 

 하와이 총 이민자는 총 56회에 걸쳐 6,747명

이민자들은 2주간에 걸친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랜 여정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8명이 또다시 귀국 조치되어 결국 93명만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들은 오아후섬 서북 끝에 위치한 모쿨레이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졌으나 그곳은 조선에서 들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저임금에 새벽 5시면 일터로 나가 매일 12시간 동안 억센 수숫대를 잘라야 했고 말이 통하지 않는 농장 감독자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마치 죄수처럼 작업복 가슴에 번호판을 달고 이름 대신 번호만으로 불리는 천대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이민자들은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가 마지막 이민자를 하와이에 내려놓을 때까지 총 56회에 걸쳐 7,226명이나 되었다. 신체검사에 불합격하거나 질병으로 입국이 거부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479명을 제하면 실제 이민자는 6,747명이었다. 그런데 하와이 이민은 3년도 안 되어 중단되었다. 매년 하와이의 일본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거액을 송금하는 상황에서 일제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1905년 4월 1일 이민금지령을 내리게 한 것이다. 당시 하와이 거주 일본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7만 명 정도였다.

한인들의 하와이 생활은, 중국인이 성씨별로 종친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이 같은 현을 중심으로 현민회를 만들어 집단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인들은 1903년 7월 4일 모쿨레이아 농장에서 첫 예배를 본 것을 시작으로 매주 예배를 보았다. 1903년 11월 10일에는 미국 내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인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존스 목사가 하와이로 파견한 홍승하 전도사였다. 그러나 홍승하는 부임한 지 1년 만에 하와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병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갔고 감리교신학교 1회 졸업생인 민찬호 목사가 후임자로 부임했다.

한인들은 교육열도 높았다. 인구 비례로 볼 때 중국계, 일본계에 비해 학생 비율이 현저히 높았으며 6년제 초등사립학교도 먼저 설립했다. 1909년 2월 설립된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에 세금 성격의 의무금을 내야 동족 대우를 받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결속도 강화했다.

 

사진 신부는 하와이 한인 사회를 발전시킨 동력

제는 이민자의 90% 이상이 혼기를 넘긴 총각들이라는 점이었다. 1910년 당시 하와이 내 14~40세 한인 남녀의 비율은 무려 13대 1에 달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상당수가 노동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도박 등에 의존하거나 농장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잦아 한인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성비 불균형 문제가 한인사회의 최대 고민거리로 떠오르자 하와이 농장주들과 목사들이 나서 조선의 규수들과 사진 중매를 추진했다.

사진 중매는 하와이 한인 남자가 본국의 처녀에게 자기의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녀들은 신랑감의 사진을 보고 사진 결혼식을 올린 다음 신랑 배우자의 자격으로 태평양을 건너 호놀룰루에 들어갔다. 이렇게 결혼한 여자들은 일명 ‘사진 신부’로 불렸다. 1910년부터 동양인 이민금지법이 발효된 1924년까지 15년간 사진 하나만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은 총 95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예비 신랑과 이국 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안고 하와이행 배를 탄 사진 신부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와이에서 보낸 남자 사진 대부분이 이민갈 때 찍은 것이어서 부두에서 처음 만난 신랑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사진 신부 대부분은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진 신부가 없었다면 하와이 한인사는 노동이민 1세대에서 끝나버렸을 것이다. 사진 신부들의 가세로 한인 가정이 형성되고 한인 2세를 생산함으로써 한인사회의 맥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2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이들이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하와이 이민역사의 씨를 뿌린 시조들이었다면 제2의 물결을 이룬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 한인 사회를 성장 발전시킨 동력이었던 것이다.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에 도착한 후 농장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바느질이나 빨래, 또는 독신 노동자들을 위한 하숙업 등을 하며 여성 노동력 공백을 메웠다. 또 남자들을 설득해 도시로 진출했는데 남자들보다 젊다 보니 도시 생활에 빨리 적응했다.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의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통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몬태나주, 애리조나주, 유타주 등으로 퍼져 나갔다.

재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통계에 따르면 1910년 당시 하와이의 한인은 4,187명이었다. 이 숫자 외에도 983명이 귀국하고 2,100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1908년 이민자 출신인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이민사회는 조선 독립운동의 강력한 지원 세력이 되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도 이들 미주 한인들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승만도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미국 한인사회가 키워낸 거물이었다. 인천의 인하대도 하와이 이민의 산물이었다. 이승만이 1915년 하와이에 세운 ‘한인여학원’(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칭)이 1947년 폐교되자 이 학교를 팔아 1953년 인천에 세운 학교가 인하대이기 때문이다. 인하대는 인천과 하와이의 앞 글자를 합친 말이다.

☞멕시코 이민

1905년 4월 해외 이민 금지령이 내려진 직후, 국제 이민 사기범들에게 속아 1,000여 명의 한인이 멕시코로 팔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기 브로커는 영국계 멕시코 국적의 존 마이어스와 일본인 오바 간이치였다. 마이어스는 일본에 본부를 둔 대륙식민회사의 한국지부를 통해 멕시코 계약 노동자를 모집했다.

이들 브로커가 서울을 비롯해 부산, 인천, 원산 등지에 사무소를 두고 1904년 10월부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10여 차례 낸 광고를 보면 “멕시코는 문명부강국으로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운 곳”, “부녀자에게는 닭을 치게 하고 하루 노동시간은 9시간이며 계약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는 등 감언이설 일색이었다. 더구나 말이 계약이지 사실상 전근대적 노예와 다름없는 예속 관계를 맺고 일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도 대한제국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해 모집을 반대하거나 금지하지 않았다.

당시 멕시코 경제개발의 주된 단위는 전근대적 고용 관계에 기초한 대농장 즉 ‘아시엔다’였는데 노동력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 정부와 대농장주에게 일본, 중국, 조선의 풍부한 노동력은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1897년부터 일본인, 1899년부터 중국인의 멕시코 이주에 이어 한국인들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1,033명의 한인 이민자들은 1905년 4월 2일 여권을 발급받고 4월 4일 영국 선박 ‘일포드’에 태워져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1905년 4월 1일자로 인천, 부산, 옥구, 무안, 평양 등지의 통상사무 책임자인 감리들에게 해외 이민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어떻게 다음 날짜에 멕시코 이민자 전원의 여권이 발급되고 또 이틀 후 제물포항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출항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행히 멕시코 이민은 이 한 번으로 그쳤다.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어린이 196명으로 구성된 이민자들이 멕시코 서부 해안 살리나 크루즈항에 도착한 것은 5월 8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하선을 허락받지 못해 4일 동안 배 안에 머물다 5월 12일 배에서 사망한 2명의 어린이를 제외한 1,0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5월 15일 최종 목적지인 유카탄주 메리다시의 에네켄(용설란) 농장 지역에 도착했다. 아시엔다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은 대체로 노예 생활과 다름없었다. 문화와 언어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계약 조건들이 허위였다는 데 고통이 컸다. 4년간의 노동계약은 사실상 4년간 노동을 해야 갚을 수 있는 부채 계약이었다. 이주 과정에서 든 경비와 계약 당시 받은 선금은 앞으로 일해서 갚아야 할 부채로 계산되었다. 노동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날이 저물 때까지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채찍을 비롯한 체형이 수시로 가해졌고 이를 견디지 못해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바로 감옥에 갇혔다.

고종은 멕시코 이민의 참상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동포들을 구하라”고 했지만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에는 이를 해결할 외교권이 없었다. 멕시코 정부 역시 외교권조차 없는 한인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이들은 사실상 ‘국제 미아’ 신세가 되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1909년 5월, 4년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법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나 대부분은 별다른 생계 수단을 찾지 못해 아시엔다에 그대로 고용되었다. 그중 일부가 쿠바 등 인근 나라로 이주하면서 한인들의 분포는 중남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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