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세계 최고의 상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1893년 3월 작성하고 2년 반 뒤인 1895년 11월 27일 이를 수정한 유언장에서 시작된다. 유언장에는 “재산은 유언집행인에 의해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한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자는 5개 부문에서 인류의 복지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 형식으로 분배하도록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유언장은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후 1897년 1월 공개되었다. 그러자 노벨의 친지는 물론 심지어 한때의 동거녀까지 재산 대부분이 노벨상에 기부된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렸다. 스웨덴 국민들도 그 엄청난 재산을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받지 말고 분배하라는 유언 내용을 알고 “국부를 해외로 유출하는 몰지각한 처사”라며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유언은 문구의 애매한 규정을 정리하고 8개국에 흩어져 있던 재산을 스웨덴으로 모으는 5년간의 작업을 마친 후 집행되었다. 노벨 재단에는 노벨 재산 3,323만 크로나(미화 770만 달러) 중 3,100만 크로나가 귀속되고, 이 가운데 2,800만 크로나는 노벨상 기금, 나머지는 운영 기금으로 투입되었다.
노벨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4살 때이던 1837년 건축업자 겸 발명가인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아버지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러시아로 이주해 지뢰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을 제조해 큰돈을 벌어 1842년 가족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의 부침에 따라 노벨은 스웨덴에서 초등학교 1년 과정만 마치고 더 이상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신 러시아에서 가정교사들의 개별 교습을 받아 다수 언어와 과학 지식을 습득했다.
17살 때인 1850년 프랑스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4년 동안 일을 하며 기계공학을 배웠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1855년 또다시 파산해 19년간 살았던 러시아를 떠나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고국에서 무색투명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이탈리아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가 1847년 처음 합성한 것으로, 폭발력은 강했지만 작은 충격에 쉽게 폭발하고 열에도 약해 운반과 취급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안전성을 높이는 게 관건이었다.
그 무렵 노벨도 미국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와 신형 뇌관과 액체 폭약을 연구한 끝에 1863년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법과 뇌관으로 특허를 받았다. 그러던 중 1864년 9월 집안 소유의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노벨의 동생을 비롯해 5명이 죽는 비극을 겪었다. 곧이어 부친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노벨은 공장의 운영을 맡아 1864년 10월 니트로글리세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가 되었다.
노벨상 대상자 선정은 분야마다 다르게 진행되어
노벨은 1866년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한 규조토는 뇌관을 연결해 불을 붙이지 않으면 폭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존의 폭약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안전한 고체 폭약을 개발했다. 곧 이 고체 폭약으로 영국, 스웨덴, 미국 등지에서 특허를 얻어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는 철도, 댐, 광산 등을 건설하느라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사장의 막대한 다이너마이트 수요는 노벨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말고도 폭발성 젤라틴과 무연화약을 잇따라 발명해 세계 각국에 폭약·탄약 공장을 짓고, 광학·기계공학 등의 분야에서도 355종의 특허를 확보해 부와 명예를 움켜쥔 백만장자가 되었다.
1876~1877년에는 두 형과 함께 러시아의 카스피해 서안에 있는 바쿠 유전지대의 개발에도 성공해 이곳을 세계적인 석유 생산지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과 파이프라인을 가동하는 등의 혁신적인 조치로 러시아 석유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사업이 확장되자 노벨은 1873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 전역의 사업을 관장했다. 노벨은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괴팍한 성격과 병약한 심신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189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하고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거처를 옮겨 살다가 1896년 12월 10일, 63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1897년 1월 2일 유언장이 공개되고 이를 토대로 노벨 재단이 발족했다. 다만 노벨상 대상자 선정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분야마다 다르게 진행되었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웨덴의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 왕립아카데미가 선정하고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노벨위원회가 선정했다.
평화상을 노르웨이가 선정한 이유는 노벨이 사망할 당시만 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가이고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1905년에 이르러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초기에는 없던 경제학상은 스웨덴 은행이 노벨재단과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1969년 신설했다.
첫 노벨상 시상식은 1901년 12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노벨의 5주기였던 이날,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분야에서 6명이 수상했다. X선을 발견한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물리학상), 삼투압과 화학반응 속도를 연구한 네덜란드의 반트 호프(화학상), 디프테리아 혈청요법을 개발한 독일의 에밀 폰 베링(생리․의학상)이 과학 부문 상을 받았다. 프랑스 시인 르네쉴리 프뤼돔은 문학상, ‘적십자의 아버지’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동맹을 창립한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는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은 식이 열리기 전부터 크고 작은 말썽으로 어수선했다. 시상자인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요즘 말로 ‘외화 낭비’를 아까워하며 시상식에 불참해 잔칫집에 찬물을 끼얹는가 하면 시상식장에도 하객이 없어 종업원, 요리사까지 드레스를 입혀 자리를 채워야 했고, 메달도 제작자가 납품 기일을 맞추지 못해 임시 메달을 수여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노벨상의 권위에 가장 큰 흠집을 낸 사례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은 것
이후에도 노벨상을 시상하면서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노벨상의 권위에 가장 큰 흠집을 낸 사례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은 것이다. 비폭력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1937년부터 1948년 암살될 때까지 5차례나 평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간디에게는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노벨위원회는 1948년 간디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려 했으나 그해 간디가 암살당해 무산되었다고 주장했다.
과학 분야에서는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노벨상을 비껴갔다. 문학상에서는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등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위대한 작가들로 꼽힌다.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 유대인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으로 1997년 공개된 심사 서류에서 밝혀졌다.
1918년 화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암모니아 합성을 성공시켜 인류를 기근에서 구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긴 했지만 1차대전 때 독가스를 개발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수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덴마크의 요하네스 피비게르는 ‘기생충이 암을 일으킨다’는 논문으로 1926년 생리의학상을 받았지만 뒤에 오류임이 드러났다. 부패 혐의까지 있던 사토 에이사쿠 당시 일본 총리가 1974년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1973년 ‘베트남 분쟁 해결’이라는 공로로 수상한 것도 비웃음을 샀다. 취임 1년도 안 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2009년 평화상을 준 것도 성급했다는 지적이 많다.
수상 거부자는 모두 6명인데 그중 독일인이 3명이나 된다. 1935년 독일의 정치범이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한 아돌프 히틀러가 1937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게 이유였다. 이에 따라 리하르트 쿤(1938·화학상), 아돌프 부테난트(1939·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생리의학상)는 수상을 거부했다.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구소련 정부와 작가동맹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 수상을 포기했다.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는 1964년 작가로서의 자유에 제약이 생긴다는 이유로, 1973년 베트남의 레둑토는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헨리 키신저와 공동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불만을 품고 수상을 거부했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은 인류의 과학을 발전시켜온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되고 있으며, 인류를 위해 희생과 성실한 노력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세계 최고의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