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제1회 고등고시 실시

광복 후 부족한 인력은 일제 때의 관리들을 활용해 급한 불을 껐다지만 정부까지 수립된 마당에 마냥 그들에게만 의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1949년 8월12일에 공포된 ‘국가공무원법’이다. 법에 의하면 ‘고시’와 ‘전형’으로 인재들을 채용할 수 있었고 고시는 고등고시와 보통고시로 구분했다. 고등고시는 다시 행정과·사법과·기술과로 나뉘었고 보통고시는 4급(현7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시험이었다. 1950년 1월6일, 첫 고등고시가 실시됐다. 이날의 고등고시는 행정과였고, 사법과는 1월26일에 치러졌다.

지원자는 각각 500여명에 달했으나, 행정과 5명, 사법과 19명 만이 합격의 영예를 누렸다. 고등고시 행정과는 1963년까지 총 14회 치러져 모두 374명이 합격했고, 사법과는 1963년까지 총16차례의 시험을 통해 667명을 배출했다. 그렇다면 이 적은 인원으로 어떻게 국가가 요구하는 모든 인력수요를 채울 수 있었을까. 해답은 시험을 거치지 않은 ‘전형’에 있었다. 한 예로 1951년부터 1959년까지 고등 전형으로만 4050명을 뽑았다. 같은 기간 행정과 합격자는 239명에 불과했다. 결국 대부분의 공직자가 정실에 의한 전형으로 선발되고, 단지 5%만이 고시로 충원된 셈이다.

행정과는 1963년 ‘공무원 임용시험령’이 제정되면서 ‘3급을류 공개경쟁채용시험’으로 개칭됐다가 1973년부터 행정고시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고, 사법과는 1963년 ‘사법 시행령’ 제정으로 사법시험 즉 사법고시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법고시는 매년 60명에서 140여명 정도를 뽑다가 5공화국이 출범하고 1980년 12월 사법시험령이 개정되면서 1981년부터는 연 300여명씩을 뽑았다. 1996년부터는 인원이 대폭 늘어나 2003년 사법고시 합격자는 906명이나 됐다. 같은 기간 행정고시 합격자는 209명(2003년)으로 늘어났다.

고급관료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고등고시의 출발점이었던 ‘과거제’는 고려 광종 때 처음 도입돼 구한말까지 이어졌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와 함께 폐지됐다. 일제는 과거제를 대신할 인재등용제도를 만들지 않고, 일본 국내의 관리임용제도를 조선에 그대로 적용했다. 당시 일본의 관리임용 시험에는 고등문관시험과 보통문관시험의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고등문관시험은 특히 한국인에게 문턱이 높아 행정과 전체 200~300명 가운데 10여명 정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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