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립운동가 서재필 별세

1951년 1월5일,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향년 87세를 일기로 너마먼 이국땅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 조국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고 조국을 찾았고 조국이 그를 멀리할 때는 다시 조국을 등져야 했던 유랑과 방랑의 한평생이었다.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8세에 과거에 합격한 그의 관심은 오직 ‘개화’에 있었다. 때문에 일본에서 선진 문물을 익힌 뒤 개화파 지도자들과 갑신정변을 주도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이났고 그는 첫 유랑길에 올랐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던 정변 실패는 그에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역적으로 몰려 부모·아내·형이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됐으며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죽었다.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서재필은 미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명 ‘필립 제이손’이라는 이름을 쓰며 1892년에는 컬럼비아 의과대를 나와 의사가 됐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됐고 첫 한국인 미국 의사가 됐다. 갑오경장 후 역적죄가 사면되고 조선 정부가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청하자 1895년 12월, 서재필은 등졌던 조국을 11년 만에 다시 찾았다.

귀국 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하며 자주독립의 정신을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렸다. 그러나 그의 계몽운동에 위기를 느낀 정부가 출국을 강요하면서 1898년 5월 그는 두 번째로 조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3ㆍ1운동을 계기로 일본 식민통치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조선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선전활동에 매달렸다. 1925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병리학자나 의사로 조용히 지냈으나 광복후의 미군정은 그가 필요했다. 하지 사령관의 고문 겸 남조선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된 것이다. 1947년 7월, 반세기만에 조국을 다시 찾았으나 이승만이 노골적으로 그를 견제하고 그 역시 정치에 뜻이 없어 결국 귀국 1년만인 1948년 9월 미 군용선 하지호를 타고 다시 인천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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