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그라나다 점령과 스페인 통일

↑ 이사벨1세

 

영국에 엘리자베스1세 여왕(1533~1603)이 있다면 스페인에는 이사벨1세 여왕(1451~1504)이 있다. 이사벨이 태어날 무렵, 스페인은 최대왕국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나라바 네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때문에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였던 이사벨과 페르디난드의 결혼(1469년)은 스페인 통합을 향한 중대한 첫 걸음이었다. 하지만 이날이 있기까지 이사벨은 중대 고비를 몇 차례 넘겨야 했다.

이사벨이 태어나고 3년 후인 1454년 엔리케4세가 카스티야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0년 후 귀족들이 엔리케4세 대신 그의 이복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은 1467년 알폰소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3년 만에 막을 내렸으나 반 엔리케파는 포기하지 않고 알폰소의 누나 이사벨을 다음 계승자로 밀었다. 엔리케4세는 힘에 밀려 이사벨을 후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긴 했으나 상황을 보아가며 딸(후아나)을 계승자로 바꿀 생각을 했다.

이사벨이 성인이 되면서 그의 결혼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의 혼인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포르투갈, 아라곤 왕국, 프랑스가 제각기 결혼 상대 후보를 내놓은 가운데 엔리케4세는 포르투갈의 아폰수5세와 혼인시켜 이사벨을 포르투갈로 보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이 마음에 두고 있는 배우자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 왕자였다. 이 사실을 안 프랑스가 반대에 나섰다. 이웃 나라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카스티야의 영주들도 강력한 왕권주의자인 페르난도를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자 이사벨은 페르난도와 몰래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장소인 카스티야 북서쪽의 바야돌리드에 1469년 입성했다. 페르난도 왕자 역시 몇몇 측근들과 함께 아라곤의 수도 사라고사를 빠져나와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469년 10월 19일 결혼했다. 엔리케4세는 자신의 허락 없이 이뤄진 이사벨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며 왕위계승권 박탈을 선언했으나 1474년 돌연 사망해 무위로 돌아갔다.

스페인 왕국으로 통일되기 전 지도

 

그러자 이사벨는 자신이 카스티야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엔리케의 딸 후아나는 별도로 왕위 즉위식을 거행했다. 양측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후아나의 남편이자 포르투갈 왕 알폰소5세와 5년간 내전 끝에 1474년 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사벨은 그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고 페르난도는 다음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이 탄생했다.

이사벨은 먼저 카스티야 귀족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킨 뒤 1482년 이슬람이 지배하는 그라나다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그라나다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711년 이래 유일하게 스페인에 남아있는 이슬람 세력이었다. 전쟁 개시 12년만인 1492년 1월 2일, 마침내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 그라나다마저 이사벨 수중에 떨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그라나다 왕국의 알함브라 궁전은 이 전쟁에서 폐허로 변할 뻔 했으나 그라나다 왕이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궁을 떠나 이 위대한 문화유산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는 780여년 만에 비로소 정치·종교적 통일을 뜻하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재정복)’를 성취하고 로마제국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스페인 왕국을 탄생시켰다.

이사벨이 자금을 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스페인이 통합된 그 해 10월에 이뤄졌다. 1492년 또 하나 역사적인 사건이 스페인에서 일어났는데 3월에 발표된 ‘유대인 추방령’이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강제로 쫓겨난 유대인 추방령은 머지않아 세계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이 사라진 스페인 왕국은 퇴조의 길을 걷게 되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몰려간 네덜란드가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 경제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492년은 세계 경제사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해였다.

이사벨은 종교탄압 군주로도 이름을 날렸다. 종교재판소를 설치·운영하면서 가혹한 방식으로 비 가톨릭을 스페인에서 추방 또는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2000여명을 불에 태워 죽였다. 그의 지나친 종교탄압은 스페인이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지 못하고 유럽식 사고방식의 영향권에서 고립되게 함으로써 스페인을 근대국가 대열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사벨은 강력한 스페인 왕국을 만들어 후손에 물려주고 53세인 1504년 11월 26일에 죽었다. 그가 꿈꿔온 유럽 통일제국은 그의 외손자인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가 대신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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