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밀란 쿤데라

 

20대 시절 공산당에 매혹돼 공산당원으로 활동

밀란 쿤데라(1929~2023)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년)이다. 소설은 주인공 토마시의 개인사와 체코의 불행한 역사를 포개놓으며 18년의 역사를 서술한다. 그 기간 토마시는 외과의사에서 트럭 운전사로 추락하고, 그의 조국 체코는 1968년 소련의 침공으로 몰락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주인공 4명의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쿤데라의 통찰과 철학이다. 얼핏 대중의 편안한 접근을 막을지도 모르는 이 철학적 주장을 위장하기 위해 쿤데라는 4명의 캐릭터에게 사랑과 연애에 관한 자극적 역할을 부여했다. 쿤데라는 이 4명의 주인공을 통해 사랑의 진지함과 가벼움, 사랑의 책임과 자유,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 등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랑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소설은 묵직한 주제인데도 특유의 경쾌한 문체를 살려 산보하듯 가볍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미국의 타임지가 ‘1980년대의 소설 베스트 10’에 선정할 정도로 특히 서구에서 각광을 받았다. 1988년 미국 감독 필립 코프먼이 연출하고 쥘리에트 비노슈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프라하의 봄’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쿤데라는 “영화가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소설의 근본적인 주제와 영화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없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소설을 영상화하겠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쿤데라는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 브루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수도사 생활을 하던 그레고어 멘델이 1866년 완두콩을 이용해 유전의 법칙을 발견하고 세계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태어난 곳이다. 아버지는 음악학교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쿤데라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체득한 음악적 소양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들었다.

쿤데라는 1948년 프라하 카를대에 입학, 문학과 미학을 공부하다가 프라하 국립영화학교(FAMU)로 옮겨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1948년 2월 체코 공산당이 좌우합작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성공하고 그해 6월 공산당 소속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쿤데라도 공산당원이었다. 쿤데라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새 질서를 찬양하는 시와 노래로 공산당을 열렬히 환영했으나 1950년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그의 성향이 ‘반공산당적’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입당과 탈당을 반복했으나 1956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비밀연설이 공개되고 체코 지식인들이 스탈린과 소련의 불법행위를 비판했을 때는 공산당원 신분이었다. 쿤데라는 훗날 자신의 에세이 ‘작가수업’에서 공산당원이었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나를 사로잡았듯이 공산주의는 나를 매혹시켰다. 공산주의는 위대하고 기적적인 변형으로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계를 약속했다.…”

 

‘프라하의 봄’ 때 개혁운동에 나섰다가 교수직에서 쫓겨나

쿤데라는 대학 졸업 후 프라하 국립영화학교(FAMU)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시와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다. 1950년 첫 시집 발간 후엔 주로 시를 썼으나 1960년대 들어서는 시 대신 평론과 희곡과 소설을 쓰다가 마지막에는 소설에 닻을 내렸다. 1963녀 첫 희곡 ‘열쇠의 주인들’과 첫 단편소설집 ‘우스꽝스러운 사랑’을 발표하고 1967년 첫 장편소설 ‘농담’을 선보여 유럽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농담’은 사소한 농담 때문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지식인의 인생유전을 그린 소설로 사회주의 체제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풍자했다. ‘농담’이 나중에 프랑스어판으로 번역되었을 때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 아라공은 서문에서 “금세기 최대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했다.

1968년 체코에 ‘프라하의 봄’이 찾아왔다. 쿤데라도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 등과 함께 민주적 개혁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소련이 무력으로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고 결국 ‘프라하의 봄’도 혹독한 겨울로 바뀌면서 되돌아가면서 쿤데라는 교수에서 쫓겨났다. 그의 책들도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제히 사라지고 책 출판은 금지되었다. 그 시절 쿤데라는 재즈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며 두 번째 장편소설 ‘생의 저편에서’를 썼다. 책은 프랑스 출판인 클로드 갈리마르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밀란에게서 건네받아 1973년 파리에서 체코어로 출간했다.

1975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렌대에서 교환교수 초청장을 보내왔다. 쿤데라는 ‘프랑스 거주 3년’ 허가증을 받아 1975년 프랑스로 갔으나 3년이 지나도 체코로 돌아가지 않아 1979년 체코 국적을 박탈당했다. 쿤데라는 1978년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1981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 사이, 소설 ‘이별’(1978)이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상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했다. 다른 작품들도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아 각종 상을 수상했다. 쿤데라는 1989년 체코 프라하 시민들이 성공시킨 ‘벨벳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고국을 방문하고 2019년 국적을 회복했다.

 

프랑스 망명 후엔 프랑스어로 작품 써

쿤데라는 프랑스에서도 한동안 체코어로 작품을 쓰다가 1978년부터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하는 체코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웃음과 망각의 책’(1979)과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은 프랑스어로 쓰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에선 금서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벨벳혁명’ 성공 후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1986), ‘배반당한 유언’(1993) 등 수필집과 ‘느림’(1995), ‘정체성’(1998), ‘무명’(2000) 등의 소설도 프랑스어로 발표했다.

쿤데라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은 대부분 프라하를 무대로 쓰였다. 몸은 비록 파리에 있지만 정신세계는 여전히 프라하의 시가지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1년 프랑스 시민이 된 후에는 자신의 작품을 ‘프랑스 문학’이라고 강조했다. 쿤데라는 1990년대부터 아예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고, 체코어로 쓴 그 이전 작품들은 자신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특히 1990년 프랑스어로 출간한 ‘불멸’은 배경과 인물이 프랑스와 프랑스인일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고방식과 세계관도 프랑스적이라는 점에서 쿤데라를 명실상부한 ‘프랑스 작가’라고 불리게 했다.

‘무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속편 격으로, 프랑스어로 써놓고도 프랑스에서 먼저 발간되지 않고 2000년 스페인과 한국(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향수’)에서 먼저 번역본이 나오고 프랑스에서는 27개국에서 번역된 후에야 2003년 발간되었다. 쿤데라는 프랑스에 정착한 후에도 과거 체코에서 겪은 비밀경찰의 감시를 의식해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대부분의 미디어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대면 인터뷰는 항상 부정확하게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그는 우려했다. 이 때문에 일상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만 3~4차례 응했을 뿐이다.

세계적인 작가로 추앙을 받던 쿤데라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2008년 체코의 한 주간지가 쿤데라의 공산정권 부역 사실이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하면서였다. 문서에는 고국에서 서방 측 첩보원 역할을 하던 체코 출신의 한 청년이 1950년 쿤데라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체코 정부가 후원하는 전체주의정권연구소도 그 청년이 쿤데라의 밀고로 체포되어 14년을 복역했다며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쿤데라는 20년 만의 언론 인터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금도 전혀 알지 못하며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모함을 받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그의 젊은 날 친소적인 행태로 미루어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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