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취임… 2차대전 후 최장수(9년 2개월) 총리의 시작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건설로 자본을 마련해 언론을 지배하고 다시 정치권력을 장악한 일생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936~2023)는 세 번(2005년 개각까지 포함하면 모두 네 번)에 걸쳐 총 9년 이상을 총리로 재임한 이탈리아의 정치 실력자였다. 그의 일생은 건설로 자본을 마련해 언론을 지배하고 그 힘으로 다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밀라노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돈맛을 알게된 것은 10대 때 나이트클럽과 유람선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청소기를 팔면서였다. 베를루스코니는 1961년 밀라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사업에 뛰어들어 밀라노 북부 외곽 지역에 수천 가구의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면서 사업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이 분양한 대단지 아파트에 들어가는 케이블TV 서비스 사업이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37살이던 1973년 직접 ‘텔레밀라노’라는 유선방송회사(SO)를 설립하면서 미디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 이탈리아 최초 민영 TV방송국 ‘카날레 5’까지 설립, 사업을 확장했다. 1982년 민영방송국 ‘이탈리아 1’과 ‘레테 4’를 사들여 이탈리아 민영TV 채널 4개 중 3개를 보유하게 되자 1987년 산하 미디어 기업들을 합쳐 ‘미디어셋’이라는 민영방송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 무렵 국영방송이 내보내는 프로그램은 고루했다. 반면 베를루스코니가 설립한 민영방송은 성적으로 자극적인 프로그램과 미국식 드라마 등을 송출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베티노 크락시 총리(1983~1987년 재임)와의 정경유착 덕분에 뒷배경도 든든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86년 파산 직전이었던 축구단 AC 밀란을 인수해 국제적 명사로 떠오르더니 신문, 잡지, 출판, 광고대행, 영화제작에도 뛰어들어 1990년대 초에는 독일 베르텔스만에 이어 유럽 2위의 미디어 재벌로 성장했다.

승승장구하던 베를루스코니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1992년이었다. 이탈리아 검찰이 가동한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 수사가 전방위로 뻗치면서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 등 다수 정치인들이 체포되거나 도주했기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에게도 검찰 수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자기 소유의 TV 네트워크와 막강한 권력을 모두 동원해 방어에 나서는 한편 정계를 기웃거렸다. 기득권 정치세력과의  정경 유착에서 더이상 단물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니 폴리테’로 움추려 있던 기존의 기득권 정치 세력들도 자신들의 이미지로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적자가 아니라 양자 격인 베를루스코니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선거전에선 자신이 소유한 언론을 모두 동원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국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는 구호 ‘포르차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와 같은 이름의 정당(전진 이탈리아(FI·Forza Italia)를 1994년 1월 창당하고, 무솔리니의 이념을 계승한 국민동맹, 남북 분리를 주장하는 북부동맹과 함께 우파 연합인 ‘자유동맹’을 결성해 1994년 3월 총선에 뛰어들었다. 선거전에서 베를루스코니가 활용한 것은 언론이었다. 자기 소유의 TV방송,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경제적인 피폐와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이탈리아를 구해낼 구원자가 자신임을 부각시켰다. 부패한 우파와 무능한 좌파에 지친 대중은 건설업으로 자수성가한 그를 개혁의 기수로 받아들였다.

선거 결과 우파 연합은 좌파 진보동맹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베를루스코니 자신도 로마의 한 선거구에서 47.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언론은 베를루스코니의 완승 배경을 몇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집권당은 물론 야당인 공산당까지 검은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존 정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깨끗한 인물로 비춰지고 둘째는 각종 경제 관련 선거공약이 국민의 관심을 끌고 셋째는 마피아, 마약밀매 등의 범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게 주효했다는 것이다. 선거 막바지에 검찰이 베를루스코니의 동생을 구속하고 포르차 이탈리아당 당사를 수색한 것도 동정표를 끌어 모은 것으로 분석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5월 11일 우파 연립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공직 경험 없이 총리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조각 과정에서 무솔리니의 후예를 자처하는 국민동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해 안팎으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2차대전 후 서유럽에서 파시스트 정당 인사가 각료가 된 것은 이탈리아가 처음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에 취임했어도 여전히 불안했다. 총선에 나설 때부터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뇌물 제공 혐의 때문이었다. 결국 1994년 12월 검찰 조사를 받고 연정의 붕괴로 1995년 1월 사임해 255일의 짧은 첫 총리 생활을 마감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96년 4월 총선에 다시 도전했다. 그의 주도로 결성한 우파 연합의 ‘자유동맹’과 좌익민주당(공산당 후신)이 중도좌파 세력을 묶어 결성한 ‘올리브나무동맹’이 대결한 총선에서는 ‘올리브나무동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로마노 프로디를 총리로 한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2차대전 종전 이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좌파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언론을 총동원해 집권당을 비판하며 정치 재기를 노렸으나 1998년 전직 총리 신분으로는 최초로 ‘마피아 지원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되어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01년 5월 총선에서 우파연합이 승리를 거둬 또다시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선거전에서 그는 경제 불황에 찌든 유권자들에게 “당신들도 나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고 ‘강력한 이탈리아 건설’을 내세운 선거 전략을 구사했다. 유권자들은 중도좌파가 집권한 5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이 유럽 전체의 평균을 훨씬 밑돈 것에 실망해 베를루스코니의 부패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 수완이 이탈리아를 경기 침체에서 구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표를 던졌다.

베를루스코니는 취임 후 1994년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2002년 2월 국영방송까지 장악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측근을 이사로 채워 국영방송국까지 사실상 장악했다. 이로써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 3개를 합치면 이탈리아 시청자의 90% 이상이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하거나 장악한 TV를 시청하게 되었다. 방송은 사실상 베를루스코니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 자신도 모델, 배우, 앵커, 쇼걸 등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과 염문을 뿌려 각종 스캔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법안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정했다. 공직자라도 경영에 참여하지만 않는다면 기업을 소유하거나 주식을 보유할 수 있다는 ‘이익상충법’(2002.3), 총리는 물론 대통령, 상원의장, 하원의장, 헌법재판소장 등 5대 고위 공직자의 임기 중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법안(2003.6) 등을 밀어붙여 통과시켰다.

하지만 경제는 추락을 거듭했다. 정부 부채는 급증하고 실업률은 급등했다. 물가는 뛰어오르고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심화되었다. 결국 2006년 4월 총선에서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에 근소한 차로 패배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프로디 총리가 자신의 신임을 묻는 상원 표결에서 패배해 20개월 만에 낙마하고 2008년 4월 총선에서 우파 연합이 승리해 베를루스코니는 3번째 총리 자리에 오르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2차대전 후 최장기 총리였으나 ‘부정부패 정치인’ 꼬리표 계속 따라다녀

세 번째 취임 후에도 성 추문과 비리 의혹은 여전했다.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별명도 계속 따라붙었다. 2010년 봄에는 로마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거물들을 모아 비밀 파티를 벌였다. 파티에서 25살 지방의회 여성 의원은 수녀 복장을 하고 스트립쇼를 펼쳤다. 언론에선 이 질펀한 섹스 파티를 ‘붕가붕가 파티(Bunga Bunga·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라고 부르며 대서특필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7세의 모로코 출신 댄서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경제 불황까지 엄습해 2011년 11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총리 재임 9년 2개월은 2차대전 후 이탈리아의 최장기 총리로 기록되었으나 집권 기간 중 ‘부정부패 정치인’이라는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녔다. 그런데도 9년 이상 총리로 재임하는 놀라운 신통력을 보인 것은 연금 덕분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생명이 간당간당할 때마다 복지 제도를 크게 키웠다. “기금이 바닥났다”는 지적이 있건 말건 노령연금을 올렸다. 재정이 말라붙었다는 아우성이 들려도 세금을 깎아줬다. 유권자들은 환호했고, ‘피고인 베를루스코니’가 법정에 설 때마다 선거라는 동아줄을 내려보내 그를 다시 총리직에 불러 앉혔다. 돌아온 총리는 또다시 연금 인상으로 보답했다. 그 사이 나라 살림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2011년 나랏빚은 1조 9,000억 달러나 되었다.

권력이 사라진 베를루스코니를 기다린 것은 각종 재판이었다. 2013년 6월 미성년자 성매매, 뇌물 등 권력 남용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2013년 8월에는 미디어셋의 세금 횡령을 주도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4년에 2년간의 공직 생활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총리 재임 중 자신이 제정한 사면법에 따라 징역 4년은 1년으로 감형되었고 그것조차 고령이라는 이유로 1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사회봉사만 하면 되었다. 2013년 11월에는 동료 의원들에 의해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동안 30여 차례나 각종 범죄 혐의로 기소되고도 불체포특권을 앞세워 사법부의 단죄를 피해왔던 그의 뻔뻔함에 결국 의회가 나서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도 베를루스코니는 2018년 복권되자마자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22년 9월 총선에서도 우파 연합으로 또다시 승리함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했다. 본인도 10년 만에 상원의원직을 되찾아 정치 일선에 복귀했으나 연립정부 구성과 사상 첫 여성 총리 탄생의 ‘킹 메이커’ 역할만 하고 별다른 직책을 맡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세월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2021년부터 만성 골수 백혈병을 앓다가 2023년 6월 12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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